이주주요요인...“토지조사로 경제상황 악화, 일본 노동시장 수요 증대, 정기항로 개설, 강제 징병․징용 정책 등” 분석돼

일제시대 일본과 제주를 오가던 기미가요마루 호.

이번 3번째 [연재] 일제강점기 재일제주인 강제동원 현황 및 실태조사(3)는 재일제주인의 이주역사와 이주시기, 이주요인에 대해 고찰하고 있다.

고광명 박사는 “이주시기 중 특히 제4기인 1939~1945년에 강제적으로 징병․징용이 이뤄졌다”며 “결국 이 시기는 다른 기간에 비해 재일제주인의 이주로 인해 인구 유출이 상당히 이뤄졌던 경우”라고 봤다.

고 박사는 '제주인의 의미'에 대해 "경제활동을 영위하면서도 다른 지역 출신자에 비해 강한 지역성을 표출하는 이중구조(二重構造)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밝혔다.

예를 들면, 재일제주인은 1925년 당시 다른 지역 출신의 한인들도 많이 거주하고 있는 이쿠노(生野)구에서 ‘섬놈’이라는 이유로 멸시당하는 이중적 차별을 일본 사회에서 감수해야만 했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도 제주도 출신자들은 역경을 딛고 일어서는 저력으로 지금의 재일제주인 사회를 형성해 왔다는 것.

고 박사는 “재일제주인은 일본 문화 속에서 생활하면서도 부분적으로 제주 문화를 지키려는 의식이 강한 이면성(裏面性)을 갖고 있다”며 “이들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점차 제주 문화를 의식하고 간직하고 있기보다는 현실적으로 일본 문화에 흡수되어 생활하고 있다”고 밝혔다.

고 박사는 이어 “재일제주인은 생활공동체(生活共同體) 성격이 강한 사람들로 형성되어 도(道) 단위보다는 마을(里․洞) 단위로 한 사회적 네트워크 특성을 지니고 있다”며 “또한 재일제주인은 고향을 떠나 일본 사회에서 생활하면서도 마을발전에 대한 의지가 강해 자신들만의 지역정체성(地域正體性)을 갖고 있다”고 분석했다.

재일제주인의 이주시기는 시기별로 ①제1기(1910년 이전), ②제2기(1910~1922년), ③제3기(1923~1938년), ④제4기(1939~1945년), 등 4단계로 구분된다.

제1기는 1910년 이전 제주도 해녀와 어부들이 일본으로 건너간 시기를 말한다.

제2기 게이한신(京阪神)지역의 노동력 수요와 제주도 출신을 고용했던 회사의 이미지가 제주도 출신의 일본 진출을 촉진시키는 요인이 됐다.

재일제주인의 이주요인으로 고 박사는 “토지조사로 제주도민들의 경우는 경제상황이 더욱 악화되고 생활의 기반을 도외에서 구할 수밖에 없어서 일본으로 이주하는 현상이 발생했고, 일본 노동시장의 수요 증대, 정기항로 개설, 강제 징병․징용 정책”으로 분석했다.

한편 재일제주인의 이주는 1922년 제주도와 오사카를 왕래하는 제판항로(濟阪航路)와 1923년 기미가요마루(君が代丸)인 정기항로가 개설되면서 매우 활발하게 이뤄졌다. 기미가요마루는 제주도와 일본 오사카를 연결시킨 직행노선의 객선이었다.

고 박사는 “(강제 징병․징용에 대해)재일제주인의 경우는 정확한 수치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지만 상당수 제주도 사람들이 연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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