Ⅱ. 일제 재일제주인의 이주 역사

편집자주
1939년 기준 재일본 제주인은 4만5900여 명에서 1945년 해방 당시 10만여 명 큰 폭으로 증가했다. 이는 이 시기 일본의 제주도민에 대한 강제징병 및 징용에 따른 결과라는 학자들의 공통적인 연구결과다. 이에 그간 4.3에 매몰된 일본이주역사에서 벗어나 일제시대 징용과 징병에 의해 일본에 끌려간 고달픈 삶을 살아온 제주인의 이주경로, 삶과 애환 등을 알아보는 기획취재를 실시하게 됐다. 제주대학교 재일제주인 연구 권위자인 고광명박사의 협조로 일본 현지에서 특별기획 취재를 통해 심층 보도할 계획이다. 이에 일본제국주의의 징용과 징병에 의해 일본에 끌려간 제주인의 이주경로, 삶과 애환 등2017년, 2018년 보고서와 2019년 보고서가 완료되면 계속해 제주뉴스는 특별기획으로 연재한다.

Ⅱ. 일제 재일제주인의 이주 역사

일제시대 일본과 제주를 오가던 기미가요마루 호.

1. 재일제주인의 의미

재일제주인의 의미는 ‘재일동포(在日同胞)’ 정호승(2007)에 따르면, 해방이전 일본으로 이주한 사람들은 ‘교포(僑胞)가 아니라 동포(同胞)이다.’라고 주장한다. 스스로 자발적으로 자기가 원해서 조국을 떠난 이들을 교포라고 부른다면, 타의에 의해 강압적으로 조국을 떠난 이들은 동포라고 불러야 마땅하다. 우리는 재일동포를 재일교포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잘못된 표현이다. 우리가 재미교포를 재미동포라고 부르지 않듯이 재일동포를 재일교포라고 불러서는 아니 된다. 그것은 조국을 언제 어떻게 왜 어떤 형편에서 떠나게 되었느냐에 따라 달리 생각되기 때문이다. 김남일․서경식․양영희․정호승․최인석(2007), '분단의 경계를 허무는 두 자이니치의 망향가', 현실문화연구, p.184.
이 개념을 원용하여 일본에 거주하는 제주도 출신자 모두를 포함하는 용어로서, 일시체류, 특별영주권자, 유학, 비즈니스, 1세, 1·5세, 2세, 3․4․5세, 귀화자 등을 모두 함축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에 거주하는 제주도 출신을 지칭하는 용어들은 제주출신 재일동포, 제주출신 재일교포, 재일 제주출신자, 제주출신 재외교민, 교민사회 등 매우 다양하게 표현되고 있다. 여기에서는 ‘재일(在日)’ 본고에서 재일(在日)이란 의미는 혈연, 지연, 학연 네트워크에 의해 형성되어 제주도와 관계를 맺고 있다는 측면에서 보면 다른 지역의 출신에 비해 지역정체성이란 맥락에서 재일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재일은 재일제주인 이주의 다양한 역사적,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배경 속에서 현재 일본에 거주하고 있는 본래의 한국국적과 조선국적(북한), 그리고 귀화하여 일본국적을 취득한 거시적 개념의 제주도 출신자를 말한다.
국가시스템에 따른 한국이나 조선(북한)이라는 국적 표시인지, 또는 우리와 같은 혈통인지, 역사나 문화에 얽힌 의식인지, 나아가서 재일한인의 권리획득을 위해 싸우는 존재인지 등 다양한 의견들이 제기될 수 있다.

이처럼 재일제주인의 용어가 다양하게 사용되어 혼란을 야기하는 상황에서 여기에서는 재일제주인의 의미를 개념적으로 정립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이들이 갖고 있는 특성을 설명하고자 한다. 고광명(2013), '재일(재일)제주인의 삶과 기업가활동',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소.


첫째, 재일제주인은 일본 사회 속에서 재일한인(在日韓人) 일본에 거주하는 한반도 출신들을 지칭하는 용어들은 재일코리안, 재일한인, 재일한국․조선인, 재일한국인, 재일조선인, 재일동포, 재일교포 등 매우 다양하게 표현되고 있다.
경제활동을 영위하면서도 다른 지역 출신자에 비해 강한 지역성을 표출하는 이중구조(二重構造) 성격을 지니고 있다. 예를 들면, 재일제주인은 1925년 당시 다른 지역 출신의 한인들도 많이 거주하고 있는 이쿠노(生野)구에서 ‘섬놈’이라는 이유로 멸시당하는 이중적 차별을 일본 사회에서 감수해야만 했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도 제주도 출신자들은 역경을 딛고 일어서는 저력으로 지금의 재일제주인 사회를 형성해 왔다.

둘째, 재일제주인은 일본 문화 속에서 생활하면서도 부분적으로 제주 문화를 지키려는 의식이 강한 이면성(裏面性)을 갖고 있다. 이들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점차 제주 문화를 의식하고 간직하고 있기보다는 현실적으로 일본 문화에 흡수되어 생활하고 있다.

그 원인은 해방 이후 60년 세월이 흐르면서 재일한인 사회의 세대교체가 꾸준히 진행되면서 의식과 가치관, 생활형태가 다양화되고, 민족교육을 받는 동포 자녀가 격감하는 가운데 일본 국적을 취득한 사람들이 증가하는 상황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재일한인 사회의 변화 속에 재일제주인은 국적이나 혈연, 의식 상태, 세대교체 등의 측면에서 복잡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셋째, 재일제주인은 생활공동체(生活共同體) 성격이 강한 사람들로 형성되어 도(道) 단위보다는 마을(里․洞) 단위로 한 사회적 네트워크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이들은 일본 사회에서 불합리한 환경을 극복하고 삶을 영위하기 위해 문중, 학교, 마을 등 여러 형태의 친목단체와 같은 비공식조직(informal organization)을 잘 형성하면서 혈연(血緣)․학연(學緣)․지연(地緣)과 같은 사회적 네트워크가 강하게 유지되는 특수성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사회적 네트워크는 본래 개인이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도움을 제공하는 상호부조의 기제(機制)로 활용되어 재일제주인 사회의 공동체적 연대성을 발휘하는 기능적 역할을 수행해 왔다.

넷째, 재일제주인은 일본 사회에서 동일한 입장의 재일한인 중에서 배우자를 찾고자 하는 가치체계의 양면성(兩面性)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제주도 출신자가 일본 사회에서 생활해 온 타 지역 출신자와 교류가 있고, 일본인보다는 가치체계가 다르더라도 동일한 국가의 사람으로서 수용하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제주도 출신자 중에서도 2․3세는 소위 재일한인으로서 타 지역 출신자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본국의 유교적 사고를 흡수하여 살아가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실제 생활에서는 제주도의 생활양식이 전달되어 가부장제적(家父長制的) 사고가 강하지 않아 결혼하면 부모와 따로 사는 등의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다섯째, 재일제주인은 고향을 떠나 일본 사회에서 생활하면서도 마을발전에 대한 의지가 강해 자신들만의 지역정체성(地域正體性)을 갖고 있다. 즉 이들은 일본에 거주하면서도 제주도 출신자로서의 자긍심을 잃지 않고 제주도에 대한 애향심을 갖기 위해 돈을 모아 고향에 기증하였다. 하지만 일본으로 이주한 세대가 1․2세에서 3․4세로 이동하면서 재일제주인의 지향성은 본국 중심에서 거주국 중심으로 전환되고 있다. 최근에는 같은 고향사람끼리 결혼할 가능성이 낮아지고 거주국의 다른 사람들과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고향으로부터 멀어져 지역정체성이 약화되는 경향이 있다.
 
결국 재일제주인의 의미라는 것은 일본 사회 속에서 온갖 차별과 멸시 속에서 피와 땀으로 재일제주인의 사회적 기반을 마련하여 재일제주인 사회를 보다 공고하게 형성하면서 그들의 활동 영역을 넓혀가고 있는 존재라고 볼 수 있다.

2. 재일제주인의 이주시기

재일제주인 사회는 일본에 거주하는 제주도 출신자에 의해 형성되어 지역 단위의 사회적 결합을 통해 문화가 유지되거나 다양한 활동이 일어나고 있는 사회를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 사회는 재일제주인의 자발적인 이주로만 형성된 것이 아니라 일본 식민지지배의 산물로서 강압에 의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일본 사회에 정착하는 데 법적 사회적으로 온갖 차별을 받아 왔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재일제주인의 이주를 시기별로 ①제1기(1910년 이전), ②제2기(1910~1922년), ③제3기(1923~1938년), ④제4기(1939~1945년), 등 4단계로 구분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1) 제1기(1910년 이전)

제1기는 1910년 이전 제주도 해녀와 어부들이 일본으로 건너간 시기를 말한다. 이 시기에는 기타규슈(北九州)지역의 어선이 제주도 어장에 출몰했던 시기로 경제적인 부를 얻기 위해 일본으로 진출했다. 당시 제주도의 어업은 전통적인 방식으로 인해 근대화된 일본의 통어선과 어로기술에 따라가지 못하면서 일본 어선에 어장을 빼앗겼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주도 출신의 일본 이주는 1903년 제주도 해녀와 어부들이 일본에 진출하면서 시작되었다.

<표 Ⅱ-1>은 1907년도 기준으로 조선인 지역별․목적별 일본 도항자의 통계를 살펴본 것이다. 이 자료에 따르면 조선인 대부분은 출가, 상업, 유학 형태 등을 통해 일본에 건너간 것으로 나타났다. 이처럼 한일병합 이전에도 일본에 조선인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대부분 출가나 유학생 신분으로 이주했기 때문에 제주도 출신들이 다소 포함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1910년 이전부터 제주도 해녀는 일본인 업자에 고용되어 한반도, 일본 등으로 진출했지만 그 배경에는 일본 어민의 제주도 진출과 밀접한 관련성을 갖고 있다.

2) 제2기(1910~1922년)

제2기는 1910년부터 1922년까지로 제주도 출신의 노동자가 일본 노동시장에 진입한 시기를 말한다. 이 시기에는 1910년 한일병합 이후 토지조사사업(1910년 3월~1918년 11월), 산미증산계획(1920~1934년)의 실시, 어업의 침탈 등 일본의 제주도 침탈이 본격화되면서 제주도민들의 생활이 매우 어려워지기 시작하여 일본으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급증하였다. 그 이유는 일제의 식민지정책에 의해 농어촌이 피폐화되면서 겪는 경제적 어려움과 일본의 공업화로 인해 대량 노동력의 필요성으로 많은 제주도 사람들이 도일했기 때문이다.

당시 제주도는 일제의 식민지정책에 호응하여 일본의 노동력 모집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여 알선하였다. 제주도 출신의 직공모집은 1914년부터 오사카 한신(阪神)을 시작으로 기타규슈(北九州) 등의 공업지대에서 노동력을 필요로 하면서 이루어졌다. 그 배경에는 게이한신(京阪神)지역의 노동력 수요와 제주도 출신을 고용했던 회사의 이미지가 제주도 출신의 일본 진출을 촉진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게다가 니시니혼(西日本)의 어민이 제주도에 출어  하여 제주도 출신을 고용했던 경험이 있었던 것도 크게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3) 제3기(1923~1938년)

제3기는 1923년부터 1938년까지로 정기항로가 개설되면서 제주도 출신자들이 일본으로 건너간 시기를 말한다. 이 시기에는 1923년 제주(濟州)-오사카(大阪)간 정기항로인 기미가요마루(君が代丸)가 운항되면서 재일제주인의 오사카 집단 거주가 더욱 활성화되었다.

일본 내무성 경보국(1923)에 따르면 1920년대 출신지역이 알려진 이주자 72,815명 가운데 경상남도 출신이 39%, 전라남도(제주도 포함) 출신이 25%, 경상북도 출신이 16%로 나타나 3개도 출신지역이 전체의 80%를 차지하였다고 한다. 內務省警保局(1935), '社會運動の現況'.

결국 정기항로 개설은 제주도 출신들이 일본으로 이동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기능을 했다. 이로 인해 제주도 출신들은 일본 진출이 용이하게 되어 1934년에 제주도 인구의 25%가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었던 것이다.

4) 제4기(1939~1945년)

제4기는 1939년부터 1945년까지로 1931년 만주사변(滿洲事變)을 일으키고 1937년 중일(中日)전쟁을 개시하면서 제주도 출신자들이 일본으로 건너간 시기를 말한다. 이 시기에는 일본의 전선(戰線) 확대에 따른 병력과 본토의 전시사업을 지탱할 노동력 확보가 필요하게 되면서 강제적으로 징병․징용이 이루어졌다.

당시 일본 정부는 1938년 4월 국가총동원법(國家總動員法)을 발표하고 1939년 7월 노동력 동원계획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1939년 9월에 조선인 노동자 모집 및 도항 취급 요강 등 국민징용령(國民徵用領)을 발표하여 강제연행이 시작되었다. 즉 일본은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매우 강제적으로 한국인을 포함한 제주도 사람들을 징용과 징병으로 동원한 것이다. 1939년 기준으로 재일제주인은 4만 5천 9백여 명에서 1945년 해방 당시에 10만여 명으로 증가하였다. 결국 이 시기는 다른 기간에 비해 재일제주인의 이주로 인해 인구 유출이 상당히 이루어졌던 경우이다.

3. 재일제주인의 이주요인

재일제주인 이주는 정책적, 행정적,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요인 등 푸시(push)와 풀(pull) 요인에 의해 많은 사람들이 일본으로 건너가면서 이루어 졌다. 이와 관련된 이주 요인을 내용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1) 토지조사사업

토지조사사업은 1910년부터 1918년까지 일본이 조선에서 시행한 대규모의 국토조사사업을 말한다. 일본의 토지조사사업은 1910년 조선을 강제 점령한 후 식민지체제의 수립을 위한 1차적 작업으로 실시한 식민지정책의 일환이었다. 일제가 실시한 토지조사사업은 토지소유권조사, 토지가격조사, 지형소유권조사로 나누어 사업을 전개하였다. 愼鏞廈(1979), '「朝鮮土地調査事業」研究', (財)韓國研究院, p.10.

제주도에서의 토지조사사업은 1913년부터 2년 동안 토지 소유주로부터 신고를 받아 처리하고 불복신고를 받아 재결 결과를 처리하여 1917년 일제의 강권으로 완료되었다. 1910년대 토지조사사업의 결과를 보면, 전국의 경우는 1918년 기준으로 전체 면적(4,871,061町)에 대해 국유지(137,225町)의 2.8%에 불과했는데 제주도에서는 1926년 기준으로 국유지(19,869町) 비중이 전체 면적(107,860町)의 18.5%에 달해 약 6.5배 정도로 현저히 국유지의 비중이 큰 것으로 나타났다(<표 Ⅱ-2> 참조).

다시 말하면 과거 개간되었던 방대한 목장토의 소유권이 국유화의 대상이 되면서 토지에 대한 농민들의 관습상 경작권이 부정되고 소멸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제는 강탈한 국유지를 다시 제주도 농민에게 반보(反步)당 1원 50전으로 불하함으로써 이중의 수탈을 자행했던 것이다. 李映勳(1990), '日帝下 濟州島의 人口變動에 關한 硏究', 高麗大學校 大學院 碩士學位論文, pp.43~49.

결국 타 지역에 비해 국유지가 많았던 제주도에서는 주로 과거의 목장과 둔토(屯土)를 경작하던 빈농들, 그리고 화전민들이 그들의 관습화된 경작권을 박탈당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제주도에서는 조세수탈과 더불어 토지조사
사업과 화전 금지를 계기로 빈농들의 상당수가 지주-소작관계가 미발달된 제주도내에서 흡수되지 못하고 지주가 거의 없는 자작농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李映勳(1990), 위의 논문, p.49.
 이 때문에 제주도민들의 경우는 경제상황이 더욱 악화되고 생활의 기반을 도외에서 구할 수밖에 없어서 일본으로 이주하는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2) 일본 노동시장의 수요 증대

제주도민들의 노동시장 진출은 1914년 무렵 오사카방적(大阪紡績)이 제주도에서 직공을 모집하여 오사카와 규슈지역의 여러 공장에 조직적으로 노동자를 유출시키면서 이루어졌다. 이것은 일본자본주의의 발달로 인한 저임금 노동자의 수요가 급격히 증가한 것에 따른 값싼 제주도 출신 노동자를 필요로 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이주 초기에 남자들은 일본인들이 취업을 꺼리는 고무, 유리공장 등에서 일을 한 반면 여자들은 방직(紡織), 신발공장 등에 취직하여 어려운 생활을 보냈다. 이후 재일제주인들은 일본 이주가 급증하면서 공원과 인부, 요업, 금속, 기계, 화학, 섬유, 제지, 피혁, 피복, 토목, 제판인쇄, 오락, 악기공업 등의 직종에 근무하였으며 일본인들에 비해 현저히 낮은 임금으로 노동시장에 진입하였다.

당시 오사카지역은 면방적, 금속, 비철금속가공 공업, 메리야스 산업 등이 발전하면서 산업기반의 중심이 되는 역할을 했다. 이로 인해 일본에서는 공장에서 일할 노동력이 부족하고 저임금 노동력을 확보하는 것이 불가능해지면서 근면하고 책임감이 강한 제주도 출신 노동자를 선호했던 것이다. 제주도도 제주도 출신자들이 오사카 노동시장에 많이 진출할 수 있도록 제주지역의 노동자를 알선․모집하거나 일본 자유도항에 깊이 관여했다고 볼 수 있다.

3) 도항관리정책

조선인의 일본 도항에 관한 정책이 뚜렷하게 형성된 것은 한일병합에 의해 조선총독부가 들어서고 조선인 노동자가 급증하기 시작한 1910년대 이후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일본 후생성(厚生省, 1987) 자료에 의하면, 일본 도항에 관한 제도를 제1기 자유도항제도시대(自由渡航制度時代, 1910~1923년), 제2기 제한도항제도시대(制限渡航制度時代, 1923~1939년), 제3기 계획도항제도시대(計劃渡航制度時代, 1939년 이후)로 구분하고 있다.

당시 일본은 기본적으로 일본 자본의 요구에 따라 일본의 국내외 정치, 사회 정세와 부분적으로 조선 내 경제 사정에 따라 조선총독부의 견제를 받으면서 조선인의 일본 도항을 장려하거나 제한하기도 했다. 이런 경우에도 사정에 따라 엄격한 제한의 시기가 있었는가 하면, 제한의 폭이 상당히 완화되는 경우도 있었다. 金基浩(1994), 「日帝下 在日 韓國人勞動者階級의 形成」, '勞動經濟論集'17(2), 韓國勞動經濟學會, pp.9~10.

<표 Ⅱ-3>에서 보면 1929년부터 출발항에서 도항이 감소한 것은 각 지역에서 정책적으로 도항을 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시 귀향자 수의 감소는 1929년 10월 이후 일시귀선증명제도를 실시한 것과 관련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일본의 도항관리정책은 전반적으로 일본 자본주의의 이익을 추구하였지만 경우에 따라 재일(在日) 일본자본가와 재조(在朝) 일본자본가의 이익이 반드시 일치한 것만은 아니었다.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는 양자의 이해관계를 적절히 조절하여 일본 자본주의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도항정책을 전개하였다. 결국 조선총독부에 의한 도항관리정책은 내지(內地) 자본가의 이익을 도모함과 동시에 조선 내의 노동력 사정과 재조 일본 사업가의 이익도 고려하여 실시되었다.

4) 정기항로 개설

재일제주인의 이주는 1922년 제주도와 오사카를 왕래하는 제판항로(濟阪航路)와 1923년 기미가요마루(君が代丸)인 정기항로가 개설되면서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기미가요마루는 제주도와 일본 오사카를 연결시킨 직행노선의 객선이었다. 선박을 소유한 회사는 아마가사기기선(尼崎汽船)으로 1922년 제1 기미가요마루(669톤)를 제주도와 오사카 항로에 취항시켰다.

이 배는 1925년 9월 제주도 동남부 즉 서귀포와 표선 사이를 향해하던 중 태풍을 만나 뭍으로 배를 돌려 좌초시키게 되었다. 이리하여 동사(同社)는 1926년부터 제2 기미가요마루(919톤, 830마력, 승선정원 365명)라는 선명으로 선박을 구입하여 제주도와 오사카를 잇는 객선으로 취항시켰다. 제주도를 서쪽으로 약 2일 만에 걸쳐서 일주하면 면(面) 소재지 11개소에 기항했고, 제주도를 출발하면 약 2일 만에 오사카 항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 외에도 조선우선(朝鮮郵船)은 1924년 함경환(咸鏡丸, 749톤)을 제주-오사카 노선에 투입하고, 그 후 경성환(京城丸, 1033톤)을 투입하여 1925년 4월부터 5년간 명령항로로 지정을 받아 운항하였다. 특히 제주도민들은 일본 이주가 증가하면서 일본 선박회사(12엔 50전)에 비해 절반 정도 낮은 운임(6엔 50전)으로 이용자들에게 제공하고자 동아통항조합(東亞通航組合)을 설립하여 1930년부터 1933년까지 교룡환(蛟龍丸, 3,000톤)을 운항하였다.

<표 Ⅱ-4>는 제주도와 오사카 항을 통한 도항자 및 귀환자 추이를 나타낸 것이다. 제주도민의 도일은 1920년대 후반 이후 매년 2만 명 이상을 차지하였는데 1935년 이후에는 1만 명을 밑돌았다. 1933년을 정점으로 일본 도항은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지만, 1935년 이후에는 그 이전에 비해 매우 줄어들었다. 이처럼 제주도민들은 1923년부터 제주도에서 오사카를 연결하는 직항항로가 열리면서 일자리를 찾아 일본으로 이주하는 데 한결 수월해졌던 것이다.

5) 강제 징병․징용 정책

일제의 조선인 강제 연행은 1939년 7월 28일부터 내무 후생차관에 의한 ‘조선인 노무자 내지 이입에 관한 건’에 의해 동년 9월부터 노무동원 계획에 의한 집단적 동원을 통해 일본으로의 도항이 이루어진다.

<표 Ⅱ-5>는 재일한인의 강제 연행된 노동자 수를 나타내고 있다. 재일제주인의 경우는 정확한 수치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지만 상당수 제주도 사람들이 연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전체 667,684명 중에서 394,295명(59%)이 탄광 및 금속광산 등 지하노동 공사에 배치되어 위험한 작업을 수행했던 것이다. 姜在彦․金東勳(1989), '在日韓国․朝鮮人歴史と展望', 労働経済社, p.44.

결국 1945년 8월까지 석탄광산, 군수공장, 토건 관계, 금속광산, 항만·운수 관계 노동자로 수많은 조선인을 일본 본토 및 그 부속도서 등지로 동원했고, 조선 내에서도 같은 시기 연인원 수백만 명 이상이 동원되었다. 또한 군인이나 군속(군 요원), 군 위안부로 수많은 여성들도 동원되었다. 김민영(1995), '일제의 조선인 노동력 수탈 연구', 한울.

- 계속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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