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8·15 광복 73주년을 맞아 1939년부터 1945년 사이 일제강점기에 강제 연행돼 일본 땅에서 처참하고 억울하게 죽은 조선인(한국인)들을 재조명해 이제라도 제대로 이들의 억울한 삶과 죽음에 대해 명복을 빌고자 3편으로 나눠 특별기획 시리즈를 연재한다. 이를 통해 정부와 지방정부의 책무를 일깨우고 독자들의 관심도 일깨워 한국만이라도 어두운 과거를 청산하는 계기로 삼고자 한다. 제1편으로 개·고양이보다 못한 삶과 죽음...일제강점기 조선인노동자들 제2편 일본 전역 원혼 떠도는 일제강점기 조선인들 제3편 정부, 일제강점기 억울한 죽음 무명인 원혼 달래줘야 등을 연재한다. 

마을공동묘지 입구에 애완동물인 개와 고양이를 기리는 묘비 모습.

후쿠오카(福岡)현 다가와(田川)군 소에다쵸(添田町)에 휴가(日向) 집안 공동묘지가 있다. 이 아주 작은 소규모 개인 묘지는 현재 마을 공동묘지가 됐다.

이곳에는 이 마을주민과 애완동물들의 묘비를 통해 망자와 애완동물의 혼을 달래고 있었다.

이 작은 마을공동묘지 입구에 개와 고양이의 작은 무덤과 묘비가 세워져 있었다. 일본인들이 자신들이 집에서 키우던 개나 고양이의 죽음을 위로하기 위해서 작은 무덤과 묘비가 세워졌다.

그러나 이를 지나면 바로 돌무덤이 보였다. 일본 산천을 뒹굴던 돌멩이가 묘비가 됐다. 돌멩이에는 이름도, 사망날짜도 없는 조선인 노동자의 무덤의 묘비가 됐다. 37개나 보였다.

개나 고양이도 비석이 있으나 하물며 인간임에도 비석조차 없었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개보다 못한 조선인의 삶과 죽음의 비참한 현실이 펼쳐졌다.

이곳 마을의 배후인 지쿠호(筑豊) 지역은 한 때 일본 석탄 생산량의 50% 이상을 생산했던 탄광촌으로 15만 명의 조선인이 강제 동원돼 석탄을 캐던 곳이다. 이중 2만 여명이 행불됐고 5천여 명이 사망한 한이 맺힌 땅이다.

이 37기의 돌멩이 묘비는 탄광서 숨진 조선인 노동자 묘비라고 한다.

돌무덤에 정성을 다해 위로하는 절을 하는 배동록 씨 모습.

이곳을 안내한 스스로를 역사의 증언자로 표현한 재일동포 2세인 배동록(裵東綠, 76)씨는 “(이들이)사람으로 대우도 못 받았다. 인권이 무시당한 시대였다. 억울하다”며 “양식 있는 일본인이 있는 반면 양식 없는 일본인이 많다”고 밝혔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개·고양이보다 못한 취급을 받는 조선인...누굴 원망해야 하나”라고 한탄했다.

이 돌무덤은 사장될 뻔했다. 그러나 배씨에 따르면 1972년  조선인강제연행진상조사단(朝鮮人强制連行眞相調査團)에서 찾았다는 것.

배씨는 “이 동네 교사 출신인 故 시바 다케오(芝竹夫)씨가 조총련(朝總聯)에 알려줘 세상에 드러났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시바 다케오씨와 친근하게 지내는 시민단체 사람이 조총련 출신이라 자연스럽게 조총련에게 이 사실을 알려준 것”이라고 말했다.
 
이곳이 알려지면서 한국의 시민단체 학생과 함께 조총련 산하 학생들이 애국 교양사업 등 한 해 여러 팀이 이곳을 방문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이곳 일본인 주민들 일부는 방문자가 늘자 항의하며 “(이곳을) 오지 말라”고 했다고 배씨는 증언했다.

묘석 대신 돌이 묘비가 된 통탄한 일이다. 이름도 사망일도 모르지만 그래도 일본의 강제노역 도중 죽어 산속에 묘비도 없이 그대로 파묻힌 수많은 조선인의 영혼보다는 훨씬 좋은 처지라는 것.

그나마 양식 있는 일본인과 일본 시민단체, 한국인들이 만든 한 묘비문에는 “희생자의 명복을 빌고 탄광의 역사를 교훈으로 해 생명의 중요성을 세상에 알려 다시는 이런 불상사가 없도록 허용하지 않기 위한 묘비가 되기를 원한다.”고 적혀 있었다.

이에 불현 듯 부산 국립일제강제동원 역사관에 “살아서도 죽어서도 버려진 조선인”이라는 홍보 글귀에 떠오르며 가슴이 아려왔다.

국립일제강제동원 역사관 교육홍보부 한 직원은 “수많은 (조선인)원혼들이 떠돌고 있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버려진 가슴 아픈 현장”이라며 “일제강점기 조선인들 일본 야스쿠니(靖国)신사(神社)에 강제로 합사돼 죽어서도 일본에 속박된 조선인”이라고 했다.

조선인 돌무덤과 일본인 납골묘가 대조되고 있는 모습. 살아서도 죽어서도 버려진 조선인.

한편 강제연행 1세대인 배 씨의 어머니는 야하타(八幡) 제철소에서 근무했다는 문감(門鑑) 신분증명서도 있으나 일본정부는 인정을 하지 않고 있다.

배 씨는 “어머니는 차별하지마라, 전쟁하지마라고 항상 교육했다”며 “(어머니는)일본학교 임시강사 20년 했다. 야하타(八幡) 제철소 조선인 1만 명 끌려갔다. 그러나 이 제철소 사료관에 조선인 강제연행 글 한 단어도 들어가지 않았다. 나쁜 사람들”이라고 말하며 일본정부의 잘못되고 왜곡된 역사관을 비난했다.

강제연행 1세대인 배동록씨의 어머니의 야하타(八幡) 제철소에서 근무했다는 문감(門鑑) 신분증명서.

배 씨가 젊은 시절 재일동포 2세로 가난과 차별 등 어려움 속에도 70대 중반까지 평화운동 등 시민단체운동을 하게 만든 원동력은 의식있는 일본인 교사를 통해 일본의 초등학생들이 직접 배 씨에게 전달되는 감상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배 씨가 일본학교에서 한국의 다양한 강의에 대해 일본인 초등학교 3학년들의 감상문이 배씨에게 우편으로 전달되고 있었다.

일본의 한 초등학생은 감상문에서 “선생님이 마지막으로 가르쳐 준 3개의 약속 1. 차별을 안한다 2. 차이를 인정한다 3. 전쟁을 안하고 평화스러운 나라를 만든다 이 약속을 지킵니다”라고 약속했다.

이 일본학생의 감상문에 배씨는 힘을 얻어 고령과 경제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평화운동 등 시민운동을 계속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들의 작은 활동이 평화와 인권 그리고 일제강점기 반인륜적 반인권적 강제연행에 대한 반성과 평화운동으로 전개돼 일본사회속에 조금씩 뿌리내리고 있었다.

1. 차별을 안한다 2. 차이를 인정한다 3. 전쟁을 안하고 평화스러운 나라를 만든다는 내용이 담겨있는 일본 초등학생의 감상문.
비참한 돌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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