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4.3 70주년을 기념해 '제주4.3사건'이란 제목으로 5회 연재한다. 이 글을 쓴 고영철 님은 함덕초등학교 교장으로 정년을 맞은 제주의 역사를 연구하고 탐구하는 향토사학자이다. 현재 흥사단 부이사장을 맞는 등 시민운동에도 앞장서고 있다. 고영철 선생은 “수정할 때가 여러군데 있다”고 말했으나 국제뉴스제주본부와 제주뉴스는 4.3 70주년을 맞아 4.3의 지역화와 내면화를 확산하기 위해 5회 연재한다.

특집 3편

4. 민간인 희생
   (1) 희생자 수
4․3사건에 의한 사망, 실종 등 희생자 숫자를 명백히 산출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4․3중앙위원회에 신고된 희생자 수는 1만4028명이다. 그러나 이 숫자를 4․3사건 전체 희생자 수로 판단할 수는 없다. 아직도 신고하지 않았거나 미확인 희생자가 많기 때문이다. 위원회 조사에서는 여러 자료와 인구 변동 통계 등을 감안, 잠정적으로 4․3사건 인명 피해를 2만5000~3만명으로 추정했다. 이는 1950년 4월 김용하 제주도지사가 밝힌 2만7719명과 한국전쟁 이후 발생된 예비검속 및 형무소 재소자 희생 3000여 명도 감안된 숫자이나, 향후 더욱 정밀한 검증작업이 필요하다고 판단된다.

위원회에 신고된 희생자의 가해자별 통계는 토벌대 78.1%(1만955명), 무장대 12.6%(1764명), 공란 9%(1266명) 등으로 나타났다. 가해자 표시를 하지 않은 공란을 제외해서 토벌대와 무장대와의 비율로만 산출하면 86.1%와 13.9%로 대비된다. 이 통계는 토벌대에 의해 80% 이상이 사망했다는 미군 보고서와 그 맥을 같이하고 있다.

특히 10세 이하 어린이(5.8%․814명)와 61세 이상 노인(6.1%․860명)이 전체 희생자의 11.9%를 차지하고 있고, 여성의 희생(21.3%․2985명)이 컸다는 점에서 남녀노소 가리지 않은 과도한 진압작전이 전개됐음을 알 수 있다.

제주도 진압작전에서 전사한 군인은 180명 내외로 추정된다. 또 경찰 전사자는 140명으로 파악되고 있다. 4․3사건 당시 희생된 서청, 대청, 민보단 등 우익단체원들은 ‘국가유공자’로 정부의 보훈대상이 되고 있다. 보훈처에 등록된 4․3사건 관련 민간인 국가유공자는 모두 639명이다.
  
(2) 민간인 희생의 유형
◉4·3사건 진상규명동지회의 高順華군은 도보로써 道 일주를 해 50여 개 부락을 대상으로 해서 조사했음을 밝히고 「일주도로변 부락에서 학살당한 양민의 수도 상상외로 많았음」을 말한 다음 「도두에서 양민 6명이 西靑의 모략으로 학살된 것을 비롯해서 외도에서는 전부락을 몰살하다시피 하여 5백 여 명의 학살시체가 불에 타는 냄새 때문에 며칠 동안은 길을 다닐 수도 없을 만큼 하였었다는 잔학상을 청취하였다」고 폭로했다. 「고산에서 3백여명, 모슬포에서 6백여명, 서귀포에서 7백여명의 양민이 집단적으로 학살되었음이 밝혀졌다」고 지적하고 이어서 토산리에서는 동리 남녀들을 공회당에 모아놓고 그중 76명을 모래밭에 끌어내어 총살시켰음」을 말하였으며 「고성과 성산리에서도 5,6백 명의 양민이 경찰과 군에 의해서 불법총살되었음이 밝혀졌고, 구좌면 행원리에서 2백여명, 동복리에서 86명이 또한 무참히 학살되었다」고 폭로했다. 이와 같은 증언 가운데 高君은 자기가 당한 조사에서 또한 밝혀진 바는 학살이 있는 부락마다 처녀들을 강간하고 이들을 총살한 천인공노의 罪惡史를 폭로했다.(국회사삼조사단 활동 제주신보 보도 자료 1960년 6월 7일)

◉濟州新報 중역실에서 접수한 양민학살 진상규명 신고서는 10일로 마감된 건수로 1,259통이 되었는 바 이로써 판명된 인명피해는 1,457명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이것을 남녀별로 보면 남자 1,172명에 여자 285명이며 학살집행자로 밝혀진 것은 軍 관계로 588명, 警察 관계로 439명인 바 기타의 不明인 것은 430명으로 그 중에는 폭도 2명도 끼어있다.
그런데 연령별로 보면 생후 10일의 영아로부터 최고 93세로 되어있고 15세까지가 98명, 70세 이상이 56명으로 되어 있으며 출신주소별과 연령별 집계는 다음과 같다.

◉애월 하귀의 張甲順씨는 〈西靑을 비롯한 극악한 당시의 민폐는 본도 양민학살의 도화선이 되었음〉을 상기시키면서 〈애월면 신엄리 자운당에서 부친을 포함한 양민 72명이 까닭 모르게 집단적으로 학살되었으며 당시의 총살집행자는 咸炳善씨를 연대장으로 하는 2연대의 소속 중위였다〉고 지적하였다. 증언이 계속되는 동안 同조사단측으로부터 학살의 동기 및 그 후의 처리 등을 질문받자 張씨는 〈부친은 일체의 정치단체 등에는 관여한 일도 없을 뿐더러 순박한 농부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사상관계라고는 추호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하고 〈총살자들은 구덩이를 파서 매장했던 것〉이라고 말하였다.(국회사삼조사단 활동 신문 보도 자료 1960년 6월 7일)

◉남군 일대의 양민학살 진상을 조사해온 鄭孟守의원은 대정에서의 특공대사건을 비롯해서 송악산에서 수백명 학살되었다는 것과 안덕에서 1백 87명, 강정에서 30명, 그리고 남원의 산간부락이 전부 소탕되었던 사실을 상기시키고 토산리의 집단학살 사건과 또한 성산에서 한번에 30~40명씩 집단학살을 당해서 그 수 2백 5명에 달했음이 조사되었다고 폭로하였다.(국회사삼조사단 활동 제주신보 보도 자료 1960년 6월 8일)

◉제주신보가 접수한 양민학살 진상규명 신고서 1,259통 가운데 고발조건이 구비된 外都洞에서의 生後 10일의 영아에 이르기까지 一家 10人의 학살사건을 當地검찰청에 고발한 바 있는데 이것은 日時 場所 虐殺執行者 證人 등 제반조건이 구비된 신고서를 토대로 한 것인 바 本道에서의 양민학살의 정식고발의 제1호로서 도민의 일대 관심사가 될 것으로 보인다.

前 濟州署 外都支署주임 金炳採경위 및  前 同지서 李允道순경이 피고발인으로 되어있는 同고발장에서 본 〈告發의 事實」은 前記 피고발인 등은 「濟州警察署 外都支署에 경찰관으로 근무당시 濟州市 外都里 252번지 거주 李亮晧 외 9명의 일가족을 法的 수속도 없이 단기 4282년 2월 17일 하오3시경 濟州市 外都1洞 속칭 절뒤(寺後)에서 죽창으로써 무자비하게 학살한 사실이 있는데 특히 피학살자 중에는 당시 7세된 李玉子(女) 당시 3세된 李玉姬(女) 생후 10일된 未作名(女)등 천진난만한 유아들을 하등의 罪目罪狀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학살한 것은 천인공노의 만행으로 思料되므로 이 진상을 철저 조사하여 엄중 의법처단하여 달라〉고 하는 내용의 것인 바 신고서에 보면 아들 한 사람이 집에 안 보인다는 유일한 명목 = 그러나 長男 李完榮은 暴徒에게 납치되어 간 것이었다.

그것이 市 外都洞 252번지에 사는 그의 부모인 李亮晧씨(당시 67세) 高貞淑씨(당시 63세)를 비롯한 그의 아내 高義順씨(당시 41세) 동생 基榮군(18세) 아들 夫婦 英熙씨(19세) 高春子씨(19세) 그 밖의 자식 봉熙(18세) 玉子(7세) 玉姬(3세) 그리고 長男胎生인 孫子인 생후 10일의 영아까지의 4代에 ○해 목숨을 바친 罪目이 된 것이었고 특히 前記 봉희君은 불구자로서 기동을 못하는 몸이었었으나 母親에 업혀 출두했었던 것이라 하며 지서주임의 명령으로 불리워내진 이 一家 10명은 한장의 청취서도 받지 않고 外都1洞 속칭 절뒤에 끌려가 하오 3시경 일가족 같은 자리에서 죽창에 의하여 학살되었던 것이라는데 영아의 從祖母의 손으로 신고된 문서에는 당시 里민보단장이었던 外都2洞 거주 李尙勳(43)씨를 증인으로 그리고 하수인과 책임자의 이름을 당시 外都주임 김병채 경위 그리고 同 李允道순경으로 뚜렷이 밝혀 있으며 진상을 규명 후 政府報償을 요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前記 長男 李完榮씨는 이런 비극이 있었는지도 모르고 暴徒에게 납치되어 가 있다가 한 달만에 歸順한 바 있었고 山에 갔었다는 일로 刑을 받아 마포형무소에서 복역중 1949년말 경에 病死했다는 통지가 왔었다고 신고인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국회사삼조사단 활동 제주신보 보도 자료 1960년 6월 23일)

◉1948년 6월 7일에는 응원경찰 40명을 포함한 저지지서 경찰이 한림읍 금악리를 덮쳤을 때, 대부분 주민들은 급히 몸을 피했으나 여든 살의 김정생 노인, 신체불구자 박두옥, 임산부 박경생, 양씨 성을 가진 여인 등 7명을 체포하고 연행하던 중 5명을 총살하였다.(제주4․3진상조사보고서 223쪽)

의귀리 현의합장묘(1994년 9월).

◉현의합장묘(顯義合葬墓) ; 1948년 11월 7일부터 시작된 2연대의 초토화작전으로 마을이 전부 불타 버리자 마을 사람들은 거처없이 야산 이곳저곳을 전전하였고, 일부 검거된 사람(약 50인)들이 폭도라는 누명을 쓰고 1949년 1월 18일을 전후하여 의귀국민학교에 수용되었다.

수용된 지 이틀 후인 1월 20일 30대 남녀 10여명이 학살되었는데, 21일 새벽 6시 30분쯤 경비대가 유격대에 의해 습격을 받았다. 전투는 경비대의 승리로 끝났으나 유격대를 추격하기보다는 습격에 대한 보복으로 22일 의귀학교에 남아 있던 60여명을 학살한 것이다.(음력으로는 1948년 12월 12일과 14일) 학살당한 사람들 중에는 의귀, 수망을 비롯한 인근 마을 및 멀리 모슬포 사람도 있었다.(4․3장정 5, 164-165쪽)(제민일보 1994년 5월 19일, 2003년 8월 28일)

1949년 1월14일자 주한(駐韓) 미군사령부의 「G-2 일일보고서」에 〈1월12일 새벽 6시 30분께 약 200여명의 유격대가 의귀(衣貴)리에 있는 제2연대 제2중대를 습격했다가 패퇴(敗退)했다. 두 시간에 걸친 접전끝에 유격대는 51명의 사망자를 내고 퇴각했다. 반면 한국군은 2명이 사망하고 10명이 부상당하였다. 유격대로부터 M-1 소총 4정, 99식총 10정, 칼빈총 3정을 노획하였다.〉고 한 기록으로 보아 2명은 전사하고 2명은 부상당한 후 사망한 듯하다. 이 때 토벌대 지휘관은 설재련 중위였다. 설재련 ; 진도 태생. 1947년 5월 경비사관학교 4기생으로 입학, 1948년 군번 10669로 소위에 임관되어 제2연대 소대장으로 출발, 동년 4․3사건이 일어나 12월 29일 제2연대(연대장 함병선)가 제주농업학교에 주둔, 또 동연대 제1대대(대대장 전부일)는 이듬해 1월 이동하여 대대본부는 서귀포에 두고 예하 제1중대는 중문에 배치하여 안덕, 대정면에 각각 1개 소대씩 주둔시켰다. 바로 설재련의 제2중대는 남원면에, 제3중대는 법환리에, 제4중대는 예비대로 두었다. 중대장 설재련은 의귀(衣貴)초등학교에 주둔, 부하 일등상사 문석춘(文錫春), 일등중사 이범팔(李範八), 이등중사 안성혁(安星赫)과 임찬수(林燦洙) 등이 재산(在山) 공산 유격대의 습격으로 순직당하였다. 그러자 설재련은 국가가 반도를 잡도록 준 총칼로 아녀자(兒女子)까지 로 순직양민에게 보복직양상을 한 것이다. 그는 한국전쟁 발발 후에 모슬포 육군 제1훈련소(소장 백선엽 준장) 후생감찰로 발령받아 소령으로 진급, 또 제주도 위수지구 사령부의 고등군법회의 심판관으로 발령, 후일 준장으로 예편되어 캐나다로 이민 갔다. 경비사관학교 4기생 가운데 장군 진급자가 10명인데 유독 설준장만이 이민갔다.(제민일보 2003년 10월 14일 김찬흡의 글 ‘장군! 현의합장묘를 아시나요’)

시신들은 경비대에 의해 학살현장에 가매장되었다가 3개월후에 토벌군에 의해 의귀리 765-7번지에 3개의 봉분으로 합장되었다. 유족들은 시체를 구분할 수 없기 때문에 합장한 채 그냥 놔 둘 수밖에 없었고 매년 7월말에 모여 함께 벌초를 한다고 한다. 유족들 일부가 모여 1973년 ‘삼묘동친회’를 조직하였고 1983년 신원이 확인된 12명의 희생자 명단을 적은 비석을 세웠다.

한편, 당시 경비대식당에서 일했었다고 하는 고운희 할머니(1994년 63세)는 “산사람들의 습격이 있었던 다음날 주민들을 운동장으로 불러내더니 잠시 후 엄청난 총소리가 들려왔다.”고 했으며, 학살 전날 남원지서로 옮겨 살아난 김명원(金明元)씨(1994년 61세)는 “이 날 어머니와 동생이 죽었는데 동생은 불과 생후 15일밖에 안 됐었다.” 고 증언했다.(4․3장정 5, 164-165쪽)(제민일보 1994년 5월 19일, 2003년 8월 28일)

필자가 의귀리 현의합장묘 앞에서 만난 한 할머니는 “그 사름덜 죽여분 딘 저디 봐지는 내창 다음다음 밭 과수원이라. 그디서 쏘안 죽으난 군인덜이 시첼 끄서단, 구루마에 실러단 덱낀 우의 또 덱끼곡 덱끼곡 허단 너미 하난 저펜드레 덱끼고, 경혼연 보래기 구지난 흙 꼼 지치는 서늉 연 내분 것이 세 밧디 산이 된 거주. 그 땐 이디가 새왓이라나서. 요거영 혼 밧이라난디 밭 임잰 산 파가랭도 못 고 난 그냥 그차 줘 분 거주.”(1994년 1월) (그 사람들 죽여 버린 곳은 저기 보이는 내(川) 다음다음 밭 과수원이다. 그곳에서 쏘아서 죽으니까 군인들이 시체를 끌어다가, 마차에 실어다가 던진 위에 던지고 또 던지고 하다가, 너무 많으니까 저쪽에 던지고. 그런 후에 보기에 나쁘니까 흙을 조금 덮어씌우는 시늉을 해서 내 버린 것이 무덤이 된 것이다. 그 땐 이곳이 띠밭이었다. 이것과 하나의 밭이었는데 밭 임자는 무덤을 파 가라고 하지도 못하니까 그냥 끊어 줘 버린 것이다.) 라고 증언하였는데 이 할머니의 말은 학살 즉시 운반한 것으로 해석되는데 착오가 있는 것 같다.

이 묘들은 유족회․사삼연구소․제주대의대법의학팀 등이 주관이 되어 2003년 9월 13일 파묘하였다. 이번 이장은 제대로 장례를 치름으로써 지금까지 구천을 떠도는 영혼들을 편안히 잠들게 하기 위한 것이며, 또한 이 무덤은 의귀리의 거의 중심부에 있고 도로를 확장하게 되면 교통사고의 위험이 예상됨에 따라 결정된 것이다. 파묘 결과 39구의 유해가 발굴되었으며 확인된 유해 따라 결남자 15구, 여자 7구였으며 이 중 결남 결청소년은 2구였다. 나머지 결7구는 부패 정도가 심해 성별확인조차 할 수 없었다. 유아가 발견되지 않은 것에 대해 법의학 강현욱 박사팀은 “유아의 경우 연골 등이 약해 흙과 융합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밝혀 실제 학살 규모는 이보다 클 것으로 추정했다. 유해들은 웅크린 모습, 엎어진 모습, 앉은 모습 등의귀리의굴되기도 했으며 주검 위에 또 다른 주검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현장에서는 관련 유물 50여 됐게 나왔는데 비녀, 옷단추, 안경알, 허리띠, 열쇠, 인주, 고무신, 놋숟가락, 철모, 군화, 총알, 탄피 등이 확인됐다.(제민일보 2003년 9월 17일)

발굴 현장을 지켜본 김홍석씨(66세)는 “당시 인근 주민들이 군인들의 지시로 주검들을 가마니로 싸고 와서 던지는 것을 목격했다. 사실상 그냥 버린 것이나 다름없다.”고 했고, 부친이 묻혀 현장에서 작업하던 김일랑씨(64세, 표선면 토산리)는 “땔감하러 갔다가 군인들에게 들켜 아버지와 붙잡혀 수용소에 들어온 뒤 아버지만 총살됐다. 아버지는 일본에서 노동자로 살다가 팔을 다쳐 귀국한 뒤 고향에서 농사만 짓던 농민이다.”며 한숨을 쉬었다.

남원읍 의귀리 거주 고은희(83세) 할머니는 “일가족이 매장된 사람도 있다는 얘길 들었다. 나도 시아주버니와 시어머니가 묻혀 시신이라도 찾으려고 왔었으나 묘 3기 가운데 2기에는 물이 차서 유골을 구별하지 못하고 말았다.”며 당시를 회고했다.(한겨레 2003년 9월 17일) 이들 유해는 화장하여 수망리 893번지에 이전과 같이 3개의 봉분으로 안장하였다.

◉박석내(박성내) 학살 ; ① 1948년 12월에는 조천 지역에서 자수사건이 일어났다. 토벌대가 〈티끌만큼이라도 유격대에 협조한 사실이 있는 사람은 자수하라. 자수하면 자유로울 것이며 나중에 발각되면 처형한다. 명단은 이미 확보하고 있다.〉고 회유하여 자수하자 함덕국민학교에 구금한 사건이다. 구금 15일이 지난 12월 21일에는 수감되어 있던 200여명에게 토벌하러 간다며 트럭에 타도록 하였다. 한 번 토벌을 갔다오면 결백이 증명되므로 곧 집으로 돌아간다는 희망을 가지고 트럭에 탔다. 동작이 늦은 50명을 트럭에 타지 못하였다. 이들은 농업학교로 향했으며 농업학교에서는 철사로 팔을 결박하고 박석내로 이동하여 총살하고 석유를 뿌려 불태워 버렸다. 그러나 이 지옥 속에서도 김태준․이원식씨가 살아나와 당시를 증언하였다.
② 1948년 12월 23일에는 제주농업학교에 수감중이던 유지(有志)들을 제주여고 입구 동쪽 박석내에서 총살하고 석유를 뿌려 불태웠다. 이곳에서 학살된 것으로 확인된 사람은 초대 제주중학교장 현경호, 제주북교 교장을 역임한 김원중, 항일운동가 배두봉, 서울신문 제주지국장이며 갑자옥 사장 이상희, 제주중학교 교사이며 현경호의 아들인 현두황 등이다.

이 두사건의 공통점은 비밀리에 총살을 집행했고, 시신을 불태웠으며, 시기가 연대 교체 직전이었다는 점이다. 비밀리에 집행한 것은 처형이 정당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고, 시신을 불태웠다는 것은 증거를 인멸하려 했다는 것이다.(참여환경연대 2004년 4월 4일 기행 자료)

이와 같은 비정상적인 처형에 대하여 4․3진상조사보고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1948년 12월(871명)과 1949년 6월(1,659명) 등 모두 2 차례 2,530명을 대상으로 실시했다는 〈4․3사건군법회의〉는 다각적인 조사 결과 재판서․공판조서 등 소송 기록이 발견되지 않은 점, 재판이 없었거나 형무소에 가서야 형량을 통보되는 등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했다는 관계자들의 증언, 하루에 수백명씩 심리없이 처리하는 한편, 이틀만에 345명을 사형선고했다고 하나 이런 사실이 국내 언론에 전혀 보도되지 않은 점, 그 시신들이 암매장된 점 등 당시 제반 정황을 볼 때 법률이 정한 정상적인 절차를 밟지 않았다고 판단된다.》(다이내믹제주 2003년 10월 20일)

◉나는 대한청년단 분대장을 맡고 있었습니다. 1949년 2월 24일 아침에 정기보고를 하러 지서(삼양지서)에 갔더니 남편이 입산했다는 이유로 젊은 여자 한 사람이 끌려와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용철(서북청년회 출신) 주임은 총구를 난로 속에 넣고 있더군요. 그리고는 젊은 여자를 홀딱 벗겼어요. 임신한 상태라 배와 가슴이 나와 있었습니다. 정 주임은 시뻘겋게 달궈진 총구를 그녀의 몸 아래 속으로 찔러 넣었습니다. 그 짓을 하다가 지서 옆 밭에서 머리에 휘발유를 뿌려 태워 죽였습니다. 우리에게 시신 위로 흙을 덮으라고 했는데 아직 덜 죽어 있던 상태라 흙이 들썩들썩했습니다.(고봉수의 증언) 이렇게 희생된 여인은 당시 21세의 김진옥으로 산으로 피신했던 김태생의 아내였다. 김태생은 이 날 아내와 부모를, 다음 날 처조부를, 또 며칠만에 장모와 처제를 잃었다. 김태생은 “무조건 총질하는 세상이 되니까 산으로 피신했다가 원당봉에 내려와 숨어 있다가 잡혔다. 좋은 사람 만나면 살고 나쁜 놈 만나면 죽는 시절이었는데 잡힐 당시 삼양지서 정 주임은 가고 최 주임이었기에 살아났다”고 말하였다. 그는 6․25가 일어나자 혈서를 쓰고 군대에 지원한 참전용사로서 1998년 작고하였다.(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419~420쪽)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사흘 후 서울을 점령당하자 위기의식을 느낀 정부는 수도를 대전을 거쳐 대구로 옮기면서 6월 29일 각지구 계엄사에 불순분자를 체포 구금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것을 예비검속이라 한다. 예비검속은 주로 보도연맹원 보도연맹(국민보도연맹)이란 좌익 세력을 전향시켜 남․북로당을 분쇄하는 데 목적을 둔 단체였다. 외적으로는 전향자들을 보도(保導)한다고 하지만 전향자가 제출한 자백서를 통해 좌익 세력을 섬멸하자는 취지가 강했다. 제주도에서 이 단체에 가입한 사람은 과거 인민위원회 간부, 3․1사건 관련자, 4․3사건 관련 재판을 받았거나 수형 사실이 있는 자들이 주요 대상이었다.(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421쪽)들에 대해 이루어졌다.

이를 기화로 제주지구 계엄당국에서는 좌익분자들을 색출한다는 미명 아래 820여명의 무고(無辜)한 양민을 검속하였다. 8월 18일 정부는 부산으로 이전하였고 예비검속자들을 처형했다.(백조일손영령 제52주기 합동위령제 리후렛 12쪽)

◉초토화작전에 의한 피해 ; 1948년 11월부터 9연대에 의해 중산간마을을 초토화시킨 강경 진압작전은 가장 비극적인 사태를 초래했다. 강경 진압작전으로 중산간마을 95% 이상이 불타 없어졌고 많은 인명이 희생됐다. 4․3사건으로 가옥 3만9285동이 소각되었는데, 대부분 이때 방화되었다. 결국 이 강경진압작전은 생활의 터전을 잃은 중산간마을 주민 2만명 가량을 산으로 내모는 결과를 빚었다. 초토화작전 기간 중 무장대의 습격으로 민가가 불타고 민간인들이 희생되는 사건도 있었는데, 대표적인 피해마을은 세화, 성읍, 남원으로 주민 30~50명씩 희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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