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4.3 70주년을 기념해 '제주4.3사건'이란 제목으로 5회 연재한다. 이 글을 쓴 고영철 님은 함덕초등학교 교장으로 정년을 맞은 제주의 역사를 연구하고 탐구하는 향토사학자이다. 현재 흥사단 부이사장을 맞는 등 시민운동에도 앞장서고 있다. 고영철 선생은 “수정할 때가 여러군데 있다”고 말했으나 국제뉴스제주본부와 제주뉴스는 4.3 70주년을 맞아 4.3의 지역화와 내면화를 확산하기 위해 5회 연재한다.

1948년 5월 하산하는 주민들.

특집 2편
3. 사건의 전개과정
   (1) 남로당의 위기 의식과 무장 봉기
1948년 3월 남로당 제주도당은 조직 노출로 위기상황을 맞고 있었다. 수세에 몰린 남로당 제주도당 신진세력들은 군정당국에 등 돌린 민심을 이용해 두 가지 목적, 즉 하나는 조직의 수호와 방어의 수단으로 다른 하나는 당면한 단선 단정을 반대하는 ‘구국투쟁’으로서 무장투쟁을 결정했다.
조천읍 신촌리에서 열린 최종 회의에서 최종무장봉기 찬성 12명, 반대 7명으로 통과되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남로당 중앙당의 직접 지시가 있었다는 최종자료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그렇다면 지금까지 논란이 되어 온 중앙의 지령설을 구체적으로 밝힌 사람은 누구인가? “남로당 중앙당의 지령에 의해 4‧3사건이 발생했다”고 유일하게 밝힌 장본인은 바로 박갑동(朴甲東)이다. 한때 남로당 지하총책을 지냈다는 그의 경력 때문에 이 주장은 상당히 신빙성 있게 받아들여졌고, 보수계열의 저작자들은 신나게 이 대목을 인용, 공산폭동의 근거로 삼았다. 이 내용은 1973년 모 중앙지에 「남기고 싶은 이야기」에서 처음 다뤄졌고, 1983년 '박헌영'이란 책자로 출간됐다)
1948년 4월3일 새벽 2시 350명의 무장대가 12개 지서와 우익단체들을 공격하면서 무장봉기가 시작됐다. 민병대의 최초의 목표는 경찰에 구치되어 고문당하는 피의자들을 구출하는 것이었다. 첫날의 민병대는 약 100명 남짓했는데, 주로 피의자의 가족들이었고, 해방 직후에 인민위원회에 참여했던 이들이 이들을 선동하고 조직․지휘했다. 민병대는 지서를 습격하여 피의자를 풀어주고 총기를 빼앗아 시가를 행진하면서 난사하며 난동을 부린 뒤 날이 새자 한라산으로 도주했다. 이 때 공산주의 구호는 없었다.(오마이뉴스 2006-01-20)

무장대는 경찰과 서청의 탄압 중지와 단선 단정 반대, 통일정부 수립 촉구 등을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미군정은 초기에 이를 치안상황으로 간주, 경찰력과 서청의 증파를 통해 사태를 막고자 했다. 그러나 사태가 수습되지 않자 주한미군사령관 하지 중장과 군정장관 딘 소장은 경비대에 진압작전 출동명령을 내렸다. 미군정은 1700명의 본토 경찰을 파견하는 한편 제주비상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육지와의 해상교통망을 차단했다.

한편, 경무부 공안국장으로서 제주비상경비사령관으로 특파됐던 김정호가 1948년 4월 28일 서울에서 가진 기자회견 내용에는 “반도를 체포해다 문초해 보면 대개 백정(白丁)들로, 좌익 계열에서는 일부 잔학한 살인을 감행하기 위해 남조선 각지로부터 백정을 모집했다 … 살해하는 도구로 쓰는 형편”(동아일보 1948년 4월 30일)이라는 엉뚱한 주장이 있었으니 당시의 경찰당국의 정보력이 그렇게 열악한 수준이었는지, 아니면 국민들로 하여금 적대감을 갖도록 조작하기 위해 그런 억지 주장을 폈는지 궁금하다.

무장대는 남로당 제주도당 군사부 산하 조직(이는 나중에 전개과정에서 중반 이후에 변화된 것을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 김익렬의 유고에는 평화회담에서 김달삼이 “민족반역자나 일제 악질경찰이 자기들의 죄상을 은폐하기 위하여 아무나 공산주의자라고 덮어씌우듯이 당신도 우리를 공산주의자라고 덮어씌우기냐?”라고 했다고 기록했다. 즉, 처음에 이들이 의거를 일으켰을 때에는 공산주의 이념이 중심에 있지 않았고 생존권 투쟁이 중심이었음을 의미한다.)으로 정예부대인 유격대와 이를 보조하는 자위대, 특공대 등으로 편성됐다. 4월 3일 동원된 인원은 350명으로 추정된다. 4․3사건 전기간에 걸쳐 무장세력은 500명 선을 넘지 않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무기는 4월 3일 소총 30정으로부터 시작해 지서 습격과 경비대원 입산사건 등을 통해 보강됐다. 4월 15일 남로당 제주도당 대회에서는 무장봉기를 추인하고 기존의 자위대를 해체해 '인민유격대'를 편성했다. 경무부 공보실장 김대봉(제주 출신, 사태 전에 제주감찰청장 역임)도 제주 시찰을 마치고 1948년 5월 5일 경무부에서 가진 기자 회견에서 “이번 폭동에 팔로군이 참가하였다느니 기관총을 가지고 있다느니 하는 풍설이 있었으나 그것은 전연 낭설이고, 폭도들은 주로 제주도민이고 그 수효는 약 300~400명으로 추측되고 있다”(조선일보 1948년 5월 6일)고 했다.
그런데 남로당 제주도당을 중심으로 한 무장대가 선거관리요원과 경찰 가족 등 민간인까지 살해한 점은 분명한 과오이다. 그리고 김달삼 등 무장대 지도부가 1948년 8월 해주 남조선인민대표자회의(남한대표 1,002명이 참가. 제주도에서는 김달삼 등 6명 참가)에 참석, 인민민주주의정권 수립을 지지함으로써 유혈사태를 가속화시키는 계기를 제공했다고 판단된다.

  (2) 평화협상과 오라리 방화사건

사삼사건이 일어난 지 25일이 지난 1948년 4월 28일 인민유격대 사령관 김달삼(본명 이승진)과 국방경비대(국군의 전신) 제9연대(모슬포 주둔) 연대장 김익렬 중령이 구억리 학교(당시 명칭 대정북공립국민학교)에서 회담을 열고 평화적인 사태 해결에 합의했다. 김익렬 사후에 세상에 공개된 유고 《4․3의 진실》에 나온 내용을 보면 김익렬 연대장이 인민유격대 점령 지역인 이곳에 부관 한 사람만을 데리고 들어가 합의를 본 주요 내용은 ①제주도내 전지역에서 적대행위 중지 ②주동자를 제외한 항전 가담자가 귀순하면 무죄 방면 ③중간 지도자들에 대한 해외(일본) 도피 지원(어선 제공) ④주동자는 자수 및 재판 회부 등이었다.(이 회담에서 내세운 연대장의 요구 조건은 ①지서습격 등 일체의 전투행위를 중지 ②즉각 무장해제 ③범법자의 자수와 명단의 작성과 제출이었으며, 김달삼의 요구 조건은 ①제주도민으로만 행정관리와 경찰을 편성하고, 민족반역자와 악질경찰 그리고 서북청년들을 제주도에서 추방 ②제주도민으로 편성된 경찰이 구성될 때까지 군대가 제주도의 치안을 책임지고 현재의 경찰은 해체 ③의거(폭동)에 참가한 여하한 사람도 전원 죄를 불문에 부치고 안전과 자유를 보장할 것 등으로 각각 3가지씩이었다)
그러나, 회담 후 3일째인 5월 1일 경찰이 무장대로 가장해 저지른 오라리 방화사건이 일어났다. 대동청단원들이 제주읍 오라리(연미마을)에서 허두경(입산자 가족)씨 집을 시작으로 12집을 불지르고 총을 쏘며 난동을 부리자 인근 민오름에 있던 인민유격대가 급히 내려와 이들을 추격했고 경찰관 가족 1명을 살해했다. 인민유격대원들이 이미 퇴각한 오후 2시 경에는 경찰이 출동했는데 경찰 가족이 숨진 것을 보고는 마을 사람 1명을 사살했고 많은 사람들이 호되게 맞았다.

불타는 오라리 공중촬영

오후 4시 30분 경에는 김익렬 연대장이 이끄는 9연대의 지프와 쓰리쿼터가 도착하자 경찰은 부리나케 마을을 빠져나갔다. 그들은 〈동아일보〉등의 언론을 통해 조작된 보도를 하도록 하는 한편, 이 장면은 지상과 공중에서 촬영되어 〈May-Day on Cheju-do〉라는 제목의 기록 영화로 만들어졌고 이를 유격대의 만행을 증언하는 홍보물로 이용했다. 영화에는 중년의 여인이 인터뷰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여인은 제주시 오라리 사람이 아니었다. 상황을 일부러 조작해 촬영한 것으로 의심되는 결정적 단서다.

이 사건을 둘러싸고 당시 국방경비대 제9연대 정보주임으로서 오라리 현장을 조사한 이윤락은 “방화사건은 우익단체의 소행”이라고 주장하였으나, 경찰은 폭도의 소행으로 엇갈린 보고를 했다. 미 군정은 경찰의 보고를 수용했다. 이에 대해 제민일보 전 편집국장이며 4․3취재반장이었던 양조훈씨의 글에서 명백히 밝혀진다.

양 씨는 “취재반은 마을 주민들이 지목한 방화혐의자를 추적했다. 90년대 초에 필자가 만난 그는 60대 후반의 건장한 체구의 소유자였다. 대동청년단원이었던 그는 처음에는 방화 사실을 완강히 부인했다. 두 번째 만났을 때 목격자들이 대질확인이라도 하겠다는 말을 전해 듣고는 비로소 방화 사실을 시인했다. 그리고 그는 그 날 경찰 트럭을 타고 서청과 대청단원들이 오라리 마을에 함께 들어갔음을 털어놓았다.

방화 뒤의 그의 행적은 더욱 가관이었다. 그는 방화사건 다음날 9연대 조사반에 의해 연행되어 감금되었다. 모슬포 군 영창에서 22일을 보낸 그는 새 연대장(박진경)의 손에 의해 한밤중에 풀려 나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제복을 입게 된다. 오라리 방화사건의 방화범이 경찰 신분으로 변신해 4․3의 소용돌이 한복판에서 맹렬하게 토벌활동에 참여했다는 이야기“라고 했다.(양조훈, 〈제주 4․3 양민학살의 진상>)

5월 3일에는 제주읍 남서쪽 야외에서 미 고문관 드루스 대위의 지휘 하에 귀순자를 호송해 오던 제9연대 7명과 미군 사병 2명에게 경찰복장을 한 무리들이 중기관총으로 난사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사태 진압의 공을 군에게 빼앗긴 경찰이 사후 책임을 두려워하여 양자간의 합의를 지키지 않고 일부러 주민들과 귀순하여오는 무장대를 공격한 것이다. 심지어 미군에게도 기습공격을 가했고, 연대장을 암살하겠다고 위협하기도 했다. 이로써 회담은 무효가 되고, 뒤이어 5월 6일에는 미군정과 조병옥의 전략에 반대한 김익렬이 해임되었고, 후임자인 박진경 연대장에 의해 수행된 초토화작전(초토화작전의 유래는 참으로 먼 옛날에서부터 찾을 수 있다. 草薙禽獮(풀을 베어내고 짐승을 사냥하여 모두 없앤다) ; 唐나라 韓愈의 送鄭尙書序 昌黎先生文集 권21에 “至分不可治乃草薙而禽獮之 盡根株痛斷乃止(매우 어지러워 다스릴 수 없으니 풀을 베어내고 짐승을 사냥하듯이 해서 모든 근원을 단절해야만 그치리라)”라는 구절이 있으니 이것이 바로 초토화작전과 같은 개념이다.(2008 南槎錄 역주 上 80쪽)으로 도민 수만 명이 희생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3) 5․10 총선 무산
미군정은 제20연대장 브라운 대령과 24군단 작전참모 슈 중령의 제주 파견, 경비대 9연대장 교체 등을 통해 5․10선거를 성공적으로 추진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5월 10일 전국투표율 94.9퍼센트로 관심 속에 치러진 총선거에서 전국 200개 선거구 중 제주도 2개 선거구만이 투표수 과반수 미달(북제주군 갑구 투표율 43퍼센트, 북제주군 을구 투표율 46.5퍼센트)로 무효 처리됐다. 그러자 미군정은 브라운 대령을 제주지구 최고사령관으로 임명, 강도 높은 진압작전을 전개하며 6월 23일 재선거를 실시하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4) 경비대원 탈영과 박진경 암살
5월 20일에는 9연대 소속 군인 41명이 모슬포부대에서 무기와 장비, 탄약 5,600발을 갖고 탈영해 무장대측에 가담하는 사건이 생겼고, 6월 18일 신임 연대장 박진경 대령이 부하 대원에 의해 암살 당한 사건이 발생해 충격을 주었다. 그 이후 제주 사태는 한때 소강국면을 맞았다.

무장대는 김달삼 등 지도부의 해주대회 참가 등으로 조직 재편의 과정을 겪었다. 이 후 무장대는 제1지대장이었던 이덕구가 지휘하게 되었다. 군경 토벌대는 정부 수립과정을 거치면서 느슨한 진압작전을 전개했다. 그러나 소강상태는 잠시 뿐이었다. 7월 15일에는 제11연대에 소속됐던 본래의 9연대 병력 배속을 해제하고 9연대를 재편성, 9연대장에 제11연대 부연대장 송요찬 소령을 발령했다. 송요찬과 그의 뒤를 이은 김상겸에 의해 강력한 ‘토끼몰이식’ 수색작전과 모두 불사르고, 모두 죽이고, 모두 약탈하는, 그리하여 불태워 없애고, 죽여 없애고, 굶겨 없애는 이른바 '삼광(三光)', '삼진 (三盡)' 작전이라는 전율할 대량학살작전이 전개되면서 유격대는 축소되어 갔고, 유격대 세력의 몇 배에 달하는 숫자의 '폭도사살' 전과가 기록되어 갔다.(엠파스 블로그)
제주 4·3 사건 당시 국방경비대 제9연대 병사들이 부대를 탈영해 한라산 게릴라 측에 가담한 사건. 9연대 병사들 가운데 한라산 무장대에 동조한 자들이 1948년 5월 새로이 부임한 박진경(朴珍景) 제9연대장의 강경 진압책에 반발해 일어났다.

1948년 5월 20일 국방경비대 제9연대 소속 하사관 11명을 포함한 병사 41명이 모슬포부대를 탈영해 한라산 게릴라 측에 가담한 사건이 발생했다. 제주도 출신이 대부분인 이들 9연대 병사들은 자신들의 무기와 탄약 5,600발, 경비대 트럭을 갖고 탈영했다. 완전 무장한 이들 탈영병들은 부대 인근인 대정면 보성리 소재 대정지서를 덮쳐 경찰관과 급사 등 5명을 사살했다. 이어 서귀포경찰서에 들어가 토벌작전에 출동한 부대라고 속여 트럭 1대를 지원 받은 뒤 남원면 신례리 방면으로 입산했다.

무장대 지휘부 아지트(어승생).

이 사건은 미군정의 토벌 정책을 더욱 강화시키는 결과를 빚었다.
미군정은 본토에서 증파된 5연대, 6연대 응원병력을 앞세워 입산사건 직후 강력한 토벌 작전을 전개했다. 미군정은 이 사건 이후 9연대를 불신했다. 사상적으로도 의심하게 되었다. 결국 모슬포 9연대는 이 사건 직후 무장을 해제당했고, 일시적이지만 격리 수용되는 수모를 겪었다. 미군정은 9연대의 존폐 문제를 심도 있게 검토한 결과, 9연대를 해체하고 잔여병력을 11연대에 흡수시켰다.

9연대 병사의 무더기 입산은 국방경비대에 토벌작전 출동 명령을 내렸던 미군정으로서는 충격적인 일이었다. 결과적으로 군인들의 입산은 유격대의 무장을 강화시키는 한편, 산사람들의 사기를 고무시켰다. 또한 무력 투쟁을 장기화하는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디지털서귀포문화대전)
남한에 대한민국이 수립되고, 북쪽에 또 다른 정권이 세워짐에 따라 이제 제주도 사태는 단순한 지역문제를 뛰어 넘어 정권의 정통성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되었다.

이승만 정부는 10월 11일 제주도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본토의 군 병력을 제주에 증파시켰다. 그런데 이때 제주에 파견하려던 여수의 14연대가 반기를 들고 일어남으로써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 속에 휘말리게 되었다.

   (5) 계엄령과 강경진압
1948년 10월 20일부터 해군 함정 7척을 동원해 제주와 육지와의 뱃길을 차단하고 모든 포구의 어선에 출어금지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1948년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됐었다. 이에 앞서 9연대 송요찬 연대장은 해안선으로부터 5㎞ 이상 들어간 중산간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배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이것이 소개령(疏開令)이다.

소개(疏開)란 원래 ‘적의 포격으로부터 피해를 줄이고자, 전투 대형의 거리나 간격을 넓히는 일’을 뜻한다(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이승만 정부는 4.3이 일어나자 무장대에 대한 진압을 위한 군병력을 제주도에 증파시키고 도민들을 탄압하기 시작한다. 토벌대는 무장대와 주민들의 연계를 막기 위해 해안으로부터 5km 이상 떨어진 지역에서 사람들의 통행을 금지하고, 이를 어기는 사람을 발견할 때에는 무조건 적으로 여기고 총살하겠다며 강제 소개시킨다. 소개령이 내려졌는데도 병자, 노인, 어린이 등을 포함한 일부 주민들은 마을을 떠나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러나 이유를 막론하고 이들에 대한 무차별 학살이 자행되었으며 소개령을 전달하지 않고 방화와 학살이 이루어진 곳도 많았다.

또한 해안지대로 소개한 주민들까지 무장대에게 협조했다는 이유로 집단적으로 학살되었다. 1948년 11월부터 9연대에 의한 강경진압작전으로 100여 곳의 중산간마을이 불타고 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다음은 소개령 당시 9연대 송요찬 연대장이 발표한 포고문이다.(박찬식의 4.3의 진실 pp.52-56)

[1948년 10월 17일 제9연대장 송요찬 포고령 포고문]
조선일보 1948. 10. 20.
 <본도의 치안을 파괴하고 양민의 안주를 위협하여 국권 침범을 기도하는 일부 불순분자에 대해 최고 지령을 봉지(奉持)하여 차등(此等) 매국적 행동에 단호 철추를 가하여 본도의 평화를 유지하며 민족의 영화와 안전의 대업을 수행할 임무를 가지고 군은 극렬자를 철저 숙청코자 하니 도민의 적극적이며 희생적인 협조를 요망하는 바이다. 군은 한라산 일대에 잠복하여 천인공노할 만행을 감행하는 매국 극렬분자를 소탕하기 위하여 10월 20일 이후 군 행동 종료기간 중 전도 해안선으로부터 5km 이외의 지점 산악지대의 무허가 통행금지를 포고함.
 만일 차(此) 포고에 위반하는 자에 대해서는 그 이유여하를 불구하고 폭도배로 인정하여 총살에 처할 것임. 단 특수한 용무로 산악지대 통행을 필요로 하는 자는 그 청원에 의하여 군 발행 특별통행증을 교부하여 그 안전을 보증함.>

이 때부터 중산간마을을 초토화시킨 대대적인 강경진압작전이 전개되었다.

이와 관련, 미군 정보보고서는 "9연대는 중산간지대에 위치한 마을의 모든 주민들이 명백히 게릴라부대에 도움과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는 가정 아래 마을 주민에 대한 대량학살계획(program of mass slaughter)을 채택했다"고 적고 있다.

이런 작전의 구상은 이미 초기 단계에서부터 진행되고 있었다. 1948년 5월 2~4일 이윤락 정보주임이 오라리 방화사건이 평화협상을 훼방하기 위한 우익청년단원들의 소행임을 확인한 후 김익렬 연대장과 함께 미군 제주본부를 찾아갔을 때 CIC 장교(소령)는 이 보고를 묵살하고 ‘폭도들의 소행’이라고 몰아세운 뒤 ‘앞으로 해안선에서 5㎞ 이상 떨어진 중산간지대를 적성지역으로 간주 토벌을 강화하라’고 명령했었던 것이다.

최초의 초토화작전은 극비밀리에 조천면(朝天面)과 애월면(涯月面) 일대의 산간부락에서 행해졌다. 그 초토화작전은 철저하게 비밀의 누설을 방지하였으므로 당사자들 이외는 아무도 몰랐다. 제주도 미군정장관이나 9연대 정보부에서도 전혀 몰랐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점차 인접부락에 이런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산간부락 주민들은 치안부재 상태에서 생명보전을 위해 할 수 없이 폭도들에 조금이라도 협력 안한 부락이 전무할 정도였다. 따라서 초토작전의 대상이 되지 않는 부락은 거의 없었다. 산간부락의 주민들은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폭도에게 가담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제주읍이나 일주도로 주변의 치안이 확보된 해변부락으로 피난하든지 양자택일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대부분은 폭도에 가담했다. 해안부락으로 하산한 주민들에 대하여 또 경찰들이 귀찮게 굴었기 때문이다.

초토화작전의 비밀이 누설되고 뒤늦게야 이 사실을 안 미군정은 강력히 이를 제지하고 수차 현상조사도 하였다. 그러나, 경찰사령관은 초토작전은 폭도들의 터무니없는 중상모략이며 주민피해와 부락의 파괴는 폭도들의 소행이라고 변명했다. 그럴 듯한 주장이었다.

나도 처음에는 폭도들이 발악적인 최후수단으로 저지른 짓이라고 보았다. 정상적인 정신을 가진 자라면 경찰이 이같은 초토작전을 감행하리라고는 믿기 어려웠다. 그러나 사실은 경찰 소행이었던 것이다. 각종 정보기관에 이를 경찰소행으로 확인해 주는 자료들이 수집되었다. 초토작전중인 경찰의 현장 사진, 그리고 토벌사령부에 산적된 산간부락에서 약탈한 금품 등이 이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미군정은 처음엔 강력히 초토작전을 반대했으나 다음부터는 어찌된 셈인지 묵인하는 태도로 나오더니 나중에는 오히려 장려하는 태도로 변했다. 미군정에서도 양론이 있었다. 치안책임 관계관은 찬성하고 군대에 배치된 군사고문은 강력히 반대하였다.(김익렬 장군 유고 《4‧3의 진실》)

계엄령 선포 이후 중산간마을 주민들이 많은 피해를 입었다. 중산간지대에서뿐만 아니라 해안 마을에 소개한 주민들까지도 무장대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다. 그 결과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입산하는 피난민이 더욱 늘었고, 이들은 추운 겨울을 한라산 속에서 숨어 다니다 잡히면 사살되거나 형무소 등지로 보내졌다. 심지어 진압 군경은 가족 중에 한사람이라도 없으면 도피자 가족으로 분류, 그 부모와 형제자매를 대신 죽이는 대살(代殺)을 자행하였다.

한편 “소개된 이재민들은 86,797명에 이르렀는데 이들은 돼지우리처럼 만든 집 속에 건초를 깔고 기거하면서 해초(海草)․야초(野草)로 그날그날을 연명하는 형편”이라고 당시 주기용 국회의원은 1949년 3월 1일부터 〈자유신문〉에 연재한 답사기에서 밝혔었다.(제주일보 2003년 6월 3일)
12월 말 진압부대가 9연대에서 2연대로 교체됐지만, 함병선 연대장의 2연대도 강경 진압을 계속했다. 재판 절차도 없이 주민들이 집단으로 사살되었다. 가장 인명 피해가 많았던 북촌사건도 2연대에 의해 자행되었다. 미군정도 이를 시인하고 있다. 〈함병선 대령이 지휘하는 2연대의 행위는 주로 반란군을 도와준 혐의를 받고 있는 해안부락민들에 대한 보복에 한정됐으며 종종 부락민들을 재판의 혜택도 없이 즉석에서 대규모로 처형하기도 했다.( 「G-2보고서」 1949년 4월 1일자)


1949년 3월에는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가 설치되면서 진압․선무 병용작전이 전개되었다. 이 작전에 대해서 다음의 주한미군사령부(駐韓美軍司令部) 「G-2보고서」 (1949년 4월 1일자)를 보면 유재흥 대령을 극찬하고 있다.

《반도들에 대한 작전은 통합부대장인 유재흥 대령이 제주도에 파견된 3월 2일 이후에야 실제로 성공하기 시작했다. 유대령은 일본군 장교의 아들이며 그 자신이 2차대전중 일본 제2방어사단의 박격포 대대장을 지냈다. 제주도 파견 전까지는 육군사관학교 부교장이었다. 그는 두루 유능한 장교이며 미 고문단에 매우 협력적이었다. 그는 자신의 부대를 해변에서 밀어올려 게릴라들과 대치중인 산으로 보냈다. 그는 사면계획을 채택해 중산간 주민에 대한 무분별한 사살을 중지토록 요구했다. 현재의 정책은 작전중 잡혔든 자발적으로 항복했든 간에 산에서 내려온 모든 사람을 구금하는 것이다. 여자‧어린이‧노인은 대부분 피난민으로 분류 고문있는 반면, 전투가능 연령의 남자들은 피난민 지위가 부여되기 전에 철저히 검색 고문 교육되어진다. 유 대령 도착이후 300명의 반도들과 그 동조자가 사살당했고 1,500명이 수감됐으며, 소총 22정과 권총 1정이 회수됐다. 무장반도들은 은신처를 이곳저곳으로 옮기느라 고통받고 있다. 3월 9일에는 軍 1개 소대의 매복을 피해가기도 했는데 이제는 정면공격이나 마을 기습 역시도 불가능한 상황이다.》

이 때 많은 주민들이 하산했다. 1949년 5월 10일 재선거가 성공리에 치러졌다. 그 해 6월 무장대 총책 이덕구의 사살로 무장대는 사실상 궤멸되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또다시 비극이 찾아왔다. 1950년 8월(음력 7월 7일) 보도연맹 가입자, 요시찰자 및 입산자 가족 등이 대거 예비검속되어 죽임을 당했다.

또 전국 각지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4․3사건 관련자들도 즉결처분되었다. 예비검속으로 인한 희생자와 형무소 재소자 희생자는 3000여 명에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 유족들은 아직도 그 시신을 대부분 찾지 못하고 있다. 이후 잔여 무장대들의 공세도 있었으나 그 세력은 미미했다.

  (6) 한라산금족령 해제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禁足)지역이 전면 개방되고 성곽경비령이 철폐되었다. 1957년 4월에는 최후의 무장대 오원권이 구좌면 송당리 장기동에서 생포됨으로써 1947년 3․1절 발포사건과 1948년 4․3 무장봉기로 촉발되었던 제주4․3사건은 실로 9년만에 막을 내리게 됐다.

===>계속 연재됩니다.

 

저작권자 © 제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