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인 1천명이상 발견된 명부는? 구 해군군속신상조사표, 왜정시피징용자명부 등 4개명부
일본 현지조사결과 명단 자료 조금씩 밝혀져...일본 재야 사학자들 연구결과 있으나 정부와 지자체 등 소극적 조사와 투자로 정체상태 ‘우려’
명부에도 없이 이름 석자도 남기지 못한 많은 제주인의 영과 혼 일본 전역과 남양군도 등 구천에 떠돌아

일본 후쿠오카에서 한국인이 운영하는 종교단체가 운영하는 조선인 무명인 등 유골함을 모셔둔 창고 모습.(사진제공=고병수 기자)

국가기록원의 일제강점기 소장 자료는 피징용사망자연명부 2만1천692명 등 11개 명부 48만 366명 이었다. 이중 제주인 명부는 피징용사망자연명부 619명 등 42개 명부에서 1만432명이 확인됐다. 그러나 오류도 발생했고 중복분도 그대로 계산됐다.

또한 2011년 12월31일 기준으로 강제연행 피해신고 접수는 22만6천638건이었다. 군인 3만7천205건, 군무원 3만9천430건, 노무자 15만7천618건, 위안부 334건 등 중 제주는 군인 423건, 군무원 527건, 노무자 1천910건, 위안부 1건, 기타 24건, 미표시 5건 등 총 2천890건 이었다. 이중 각하.기각.불능은 75건으로 나타났다.

해방이전 악랄한 일제가 태평양전쟁 패전이후 관련 문서를 불태웠음에도 남아있는 자료 중 국가기록원 자료를 중심으로 공원명부(工員名票), 구일본육해군징용선사망자명부, 구해군군속신상조사표, 구해군군인이력원표, 왜정시피징용자명부, 유수명부, 육군운수부군속명부, 朝鮮人勞動者에 關한 調査結果, 피징용사망자연명부 등 9종에 제주인의 현황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일본 현지 조사결과 일본 정부가 불태웠음에도 많은 자료가 조금씩 밝혀지고 있고 일본 재야 사학자들의 연구결과도 있어 명부 자료는 더 나올 수 있으나 정부와 지자체 등의 매우 소극적인 조사와 투자 등으로 더 이상 진척이 안되는 정체 상황이라 우려되고 있다.

명부에도 없이 이름 석자고 남기지 못하고 죽은 수많은 제주인의 영과 혼이 일본 전역과 남양군도 등 구천에 떠돌고 있어 이에 대한 대처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4.3에 매몰된 일제강점기 억울한 죽음과 강제노역 등 진정한 과거사 정리가 필요하다는 지적과 주장이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다.
 
보고서 연구진은 이번 분석도 ”제주인 강제동원 전체의 현황을 밝힌 것은 아니다“라는 입장이다.

보고서 연구진들은 ”현재까지 이런 형태의 작업은 진행되지 않았고 이번 실태보고서는 강제 동원된 제주인의 실태를 파악할 수 있는 기초자료로 분명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보고서에서 데이터화한 명부자료들은 개별 자료들마다 구성 항목의 차이를 지니고, 판독의 곤란함 등을 지니고 있어 일정한 한계를 분명 지니고 있으나 제주인 강제동원 관련 데이터를 축적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는 분명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고 할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제주도가 주관하고 제주대학교 탐라연구문화원에서 조사한 ‘2019년 일제강점기 제주인 강제동원 실태조사’보고서는 국가기록원에 소장 중인 자료 중에서 제주인 관련 기록이 존재하는 일부 명부자료에 대한 분석에서 이같은 결과가 나왔다.

보고서가 밝힌 제주인의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명부는 총 9종으로 나타났다.

특히 일본 관련 박사급 등 인력 11명이 투입되어 4개월의 짧은 기간임에도 그나마 성과를 이뤘다고 보고서는 분석했다.

이번 보고서에는 9종을 바탕으로 현재까지 개괄적으로만 알고 있었던 제주인의 강제동원 현황을, 기초자료인‘명부자료’를 통해 보다 세밀하게 밝힐 수가 있었다.

‘남양군도에 갔다더라’, ‘일본에 끌려 갔다’, ‘군인으로 갔다, 노무자로 갔다’등등 강제동원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언급을 하고 있다.

그러나 어느 규모의 제주인들이 언제 동원되어, 어느 지역, 어느 부대나 회사에 투입됐고, 언제 어떻게 사망하였는가와 같은 세부적인 내용은 말하지 못한다는 것. 이를 알려주는 기초자료에 대한 분석이 그동안 진행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데이터화 작업과 분석을 통해 파악한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1) ‘조선인 노무자에 관한 조사결과’
제주 14개 읍·면 출신 약 355명의 제주인 기록이 확인된다.

이들은 일본 9개 현(한국 시도같은 광역행정체재)에 소재한 약 40개 작업장에 투입됐다. 가장 많이 투입된 지역은 효고(兵庫)현으로 269명이 투입됐다. 그 중에서 하리마조선소(播磨造船所)는 약 230명으로 가장 많은 제주인이 투입된 작업장이다.

출신 지역으로는 제주읍(현 제주시)출신이 65명으로 가장 많았다. 다음으로 한림 61명, 애월 42명 등이 동원됐다. 1887∼1932년생들이 동원되었고 14세의 어린 나이에 동원된 경우도 있다. 이들은 각 작업장에서 약 36개에 이르는 다양한 직종으로 노역에 투입됐다.

2) ‘유수명부’
일본 육군의 군인·군속으로 동원된 총 769명의 제주인 기록이 확인되고 있다.

그 중 군속은 252명, 군인은 512명이다. 군속의 경우 총 13개 읍·면에서 동원됐다. 제주읍 출신이 76명으로 가장 많았다. 이어 구좌 29명, 한림·성산 각각 27명이 동원됐다. 동원 시점은 정확히 파악되지 않으나, 1940년 9월부터 1945년 7월에 걸쳐 동원됐다.

일본의 패전(1945년) 당시 20대였던 인원이 108명으로 가장 많이 동원됐다. 이들은 약 103개 단위 부대에 간호부, 선원, 공원 등 다양한 직종으로 노역에 투입됐다. 임금은 적게는 월 10엔부터 많게는 월 260엔까지 자료를 통해 확인됐고 월 40∼60엔 정도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자료상에 기재된 액수일 뿐으로 이것이 실제로 지급되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태평양전쟁 유족회 유족 등의 증언에 따르면 이들 일제는 아주 치밀하게 보험증서, 예금증서 등은 주고 현금은 주지 않은 것으로 드러나기도 했다. 생존자 경우 유품으로 현재  예금통장 같은 것만 휴대하고 해방후 고국으로 돌아온 것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군인도 13개 읍·면에서 동원됐다. 제주읍에서 가장 많은 102명이, 이어 한림 69명, 애월 60명, 구좌 55명 등이 동원됐다. 이들은 1940∼1945년 사이에 동원됐다. 조선인 징집이 시행된 1944년에 가장 많은 249명이 동원됐다. 징집 대상인 1924년생이 215명, 1925년생이 47명 동원됐다. 이들은 약 213개 단위 부대에 투입됐다. 계급은 이등병부터 소위까지 9개 계급이 확인되는데, 역시 이등병, 일등병, 상등병과 같은 하급병들이 각각 162명, 133명, 120명으로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이들이 투입된 병종은 보병부터 헌병에 이르기까지 총 15개 병종에 투입되며, 역시 보병이 가장 많은 231명을 차지하고 있다.

3) ‘임시군인군속계’
임시군인군속계 양식의 문서 이외에‘제2국민병병적계’를 포함한 2종의 다른 문서를 확인하였다.
총 13개 읍·면 출신 976명이 확인되며, 제주읍에서 가장 많은 159명, 뒤를 이어 한림면 129명, 애월명 121명 등이 동원되었다. 1914∼1931년생들이 동원되었는데, 1924년생이 727명으로 가장 높은 비중(75.6%)을 차지한다. 동원 시기는 1940∼1945에 걸쳐 분포하며 1944년에 가장 많은 663명이 동원되었다. 군속의 경우 7명만 확인된다.
군인의 경우 이들이 투입된 약 300개에 달하는 부대명이 확인되나 그 정확도가 떨어지는 한계를 지닌다. 가장 많은 575명이 투입된 보병 이외에 약 15개 병종이 확인되며, 이등병이 가장 많은 309명을 차지한다.

4) ‘구해군군인이력원표’
총 301명의 제주인이 동원됐다. 해군 군인의 경우 최초 해병단에 투입되어 훈련을 받은 이후 개별 부대에 투입됐다. 261명은 진해 해병단으로, 40명은 오사카 해병단 다나베 분단에 투입됐다.

총 13개 출신 읍·면이 확인되며, 제주읍에서 가장 많은 59명이, 이어 조천면 39명, 한림면 34명 등이 동원됐다. 이들의 동원 시기는 군인이라는 특성상 1944년 11월 1일 97명, 1945년 2월 1일 123명이 일시에 동원되는 모습을 보인다.

출생년도 분포는 육군과는 달리 1924년부터 1928년 사이에 균등하게 집중되는 양상을 보인다. 약 51개의 개별 부대에 투입되었는데, 3개의 개별 해군시설부에 가장 많은 56명이 약 20개 항공대에 54명이 투입됐다. 가장 많은 104명이 투입된 수병을 비롯한 총 8개 병종에 병장∼이등병까지 4계급으로 투입됐다.

5)‘왜정시피징용자명부’
총 14개 읍·면 출신 1천583명의 기록이 확인됐다. 애월면이 가장 많은 237명, 이어 남원 170명, 대정 167명, 제주 141명 등의 동원이 확인됐다. 동원 시기는 1932∼1945년에 걸쳐 분포하는데, 1943년의 608명을 중심으로 1941∼1944년에 집중되는 양상을 보인다. 동원 당시 연령은 17∼64세까지 다양한 분포를 나타내는데, 주로 20∼30대에 집중되어 있으며, 20대가 전체의 과반 이상을 차지했다.

6)‘피징용사망자연명부’
총 13개 읍·면 출신 619명의 기록이 확인됐다. 구좌면이 가장 많은 133명이었다. 이어 한림 117명, 제주 94명 등이었다. 출생 시기는 1879∼1936년까지 매우 넓게 나타나고 주로 1915∼1923년생에 집중되는 양상이 나타난다. 육군 199명(군인 51명, 군속 138명, 선원 10명), 해군 115명(군속 114명, 군인 1명), 소속 불명 149명(군속 114명, 군인 3명, 선원 28명)이 확인된다.

이들의 사망 시기는 1936∼1948에 걸쳐 나타나며, 1944∼1945년에 각각 249명, 240명으로 집중되는 양상을 보인다. 이들이 투입된 육군 부대는 약 58개, 해군 부대는 약 38개가 확인된다.

7)‘구해군군속신상조사표’
총 1천214명의 기록이 확인됐다. 2018년도 조사보고서에서 분석한 810명의 공원을 제외한 402명의 선원의 경우, 총 13개 읍·면에서 동원됐다. 한림면이 가장 많은 104명, 다음으로 구좌 92명, 성산 40명 등이 동원됐다. 대부분 1940∼1945년 사이에 동원됐고 1943년에 가장 많은 127명, 다음으로 1944년에 100명이 동원됐다. 10대부터 5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가 동원됐고 주로 20∼30대가 동원됐다. 20대의 경우 과반에 가까운 176명이 동원됐다.

이들이 승선한 선박은 약 272척이 확인됐으며 이 선박들은 약 55개 군 부대 및 부서 등 약 48개의 회사 소속으로 확인됐다. 이들은 선장, 기관장, 수부 등 다양한 직책으로 노역에 투입되었는데, 주로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하급 직책에 다수가 투입됐다.
이들 중 과반을 상회하는 241명이 사망했다.

1944년에 가장 많은 109명, 이어서 1945년에 83명이 사망했다. 이들은 주로 잠수함 및 항공기의 공격으로 인한 선박의 침몰로 사망했다.

8)‘구일본육해군징용선사망자명부’
총 369명의 기록이 확인됐다. 1983∼1930까지 다양한 출생년도 분포가 확인됐다. 1919∼1924에 집중되는 양상을 보인다. 기관부 111명, 갑판부 140명 등으로 투입됐다. 이들이 승선했다가 침몰한 약 266척 이상의 선박명이 확인되고 있다.

보고서는 ”이상과 같이 데이터화 작업을 통해 확인한 내용들은 현재까지 알려지지 않은 보다 구체적인 제주인 동원 현황을 파악케 해주는 귀중한 기초자료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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