Ⅴ. 결론 및 시사점
1. 결론

본 실태조사는 일제말기(1939∼1945년) 제주도를 떠나 일본에 강제적으로 동원된 재일제주인 1세들의 자취를 추적 발굴하여, 향후 재일제주인의 강제동원 관련 기초자료를 제공하고 역사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추진하였다.  조사 결과를 종합하면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일본 8개현 현지조사를 수행하면서 그 당시 억울하게 돌아가신 선조들의 원혼을 달래는 의미에서 규슈/오키나와 지방에 있는 추모비, 추도비, 위령비 등(36개)이 있는 곳을 찾아 재일조선인 관련 비(碑) 현황을 파악하였다.

둘째, 일본 규슈/오키나와 지방에서 활동하고 있는 연구자, 시민단체, 민단 관계자, 종교인 등을 통해 강제동원 관련 통계자료를 확보하고 일제강점기 재일제주인 강제연행에 대한 조사‧연구 현황을 파악하였다.

셋째, 오키나와(沖縄)현 평화기념 공원에 있는 평화의 초석(刻銘者名簿)에서 제주도 출신이 일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넷째, 오사카에서 오키나와로 강제 연행된 제주도 출신이 사망했다는 기록이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미군에 의해 포로로 잡혀서 생존한 사실을 확인하였다.

다섯째, 『殉職産業人名簿』에서 제주도 출신(1명)이 사망한 사실을 확인하였는데, 그 명부에는  연행연월, 사업소(기업), 성명, 나이, 유족(성명 등), 본적지 등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여섯째, 국가기록원과 竹内康人編(2015) 자료를 통해 강제 동원된 제주도 출신이 있는지에 대해 살펴보았는데, 일부 명부가 기록되어 있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일곱째, 아직도 사망자 명단을 확인하지 못한 유족들을 비롯하여 발견되지 않은 유골이 일본 규슈/오키나와 지방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과 함께 강제동원 관련 비(추도비, 추모비, 위령비 등)가 세워져 있지 않는 지역이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일제강점기 제주도에서도 다수의 제주도 출신들이 강제 동원되었고, 이들의 기록이 남아 있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제2장 제5절의 해군 군속의 경우와 같이 분석과 연구를 통해 이들이 겪은 강제동원의 실태를 일정하게 파악할 수 있는 자료적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2. 시사점 및 한계

본 조사를 통해 얻어진 결과들은 최근 재일한인 강제동원에 대해 중요하게 인식되는 시기에 국내외 강제동원 연구자들에게 많은 시사점을 제공해 줄 것이다.

첫째, 명부자료의 분석을 통해 강제 동원된 제주도 출신들의 일반적으로만 알려진 피해실태를 보다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일본 권역별(8개 지방)로 재일제주인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한 실태조사를 장기적이고 체계적으로 추진할 필요성이 있다.

둘째, 국가기록원, 연구자, 경상원(慶尙院) 방문 등을 통해 재일제주인 강제동원 명부를 입수해야 할 필요성이 있음을 인식하였다. 그런 측면에서 본 조사에서는 일부이지만 강제 동원된 재일제주인 명부를 확인하고 작성했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셋째, 규슈/오키나와 등 재일본대한민국민단 지방본부가 보관하고 있는 재일한인(재일제주인)에 대한 소중한 자료(국민등록갱신·신규신청서)’ 을 원본 복사, 사진 스캔 등의 방법을 통해 기록으로 남기는 작업이 이루어진다면 강제동원과 관련된 상황을 좀 더 상세하게 파악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것이다.

넷째, 노무현 정부 당시 피해보상을 위해 제주도민들이 작성하여 신청한 자료 등이 국가기록원에 보관되어 있는 것을 사본만이라도 제주도에 반환되도록 시도하여 소중한 연구 자료로 활용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국가기록원이 보내 준 자료는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많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첫째, 낮은 용량의 파일을 보내줌으로써 저질의 화질로 인해 이들의 구체적인 동원실태(투입 지역 및 작업장, 신분 등)에 대한 파악이 불가능하였다.

둘째, 국가기록원은 자료와 같이 송부한 ‘색인’에 ‘총 10,432명의 제주인’이라고 기재하여 보냈으나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이 ‘색인’은 여러 자료의 중복은 물론이고 동일자료 상에서의 중복 부분도 포함한 수치였다. 따라서 현재 한국의 정부 기관이 소장하고 있는 자료상에 기재되어 있는 강제 동원된 제주인의 정확한 수치를 파악할 수 없는 한계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셋째, 현지조사 과정에서 1세대들의 강제연행에 대한 경험자들이 이미 사망한 경우가 많아  이들 가족들에 대한 구술을 채록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아주 일부만 명단이 확보되고 있으나 과거 일본의 군수공장, 탄광 등의 지역뿐만 아니라 도쿄, 오사카 등 대도시에도 강제 동원된 사례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이에 대한 현지조사도 필요한 상황이다.

넷째, 일본의 재야 사학자와 스님 등 종교계 인사들이 갖고 있는 자료가 일부 있으나 이들의 일부는 한국과 일본 정부 등에 정보공개를 요구하고 있다. 원본 등의 전체 자료는 개인이 소장하거나 개인정보 유출 등을 이유로 공개를 꺼려 이에 대한 체계적인 수집이 필요한 실정이다.

다섯째, 아직까지 일본 정부가 일제강점기에 대한 인식이 변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일본에서 이를 연구하거나 활동하는 연구자나 시민단체 회원 등의 제약이 상당한 것으로 판단된다.

여섯째, 오키나와(沖縄)현 평화공원에 각명되어 있는 피해자에 대해 일본인이나 대만 등 우호 국가 사망자들은 생년월일, 출신지 등이 기재되어 있으나 조선인 출신들은 생년월일, 출신지 등이 미 기재되어 있어서 이에 대한 행정적인 조치가 필요한 상황이다.

3. 제언

강제동원은 과거, 우리 민족이 그리고 우리 제주도 출신이 겪었던 ‘수난의 역사’로 다시는 되풀이 되지 않아야 하는 역사적 사건이었으며, 또한 미래지향적인 한일 양국 간의 발전적인 관계를 수립하기 위해,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중요한 과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중앙 정부 차원의 강제동원 관련 조사 및 연구는 2015년 12월 소위 ‘한일 위안부 협정’으로 중단되어 있는 상태이다. 중앙정부 차원에서 중단된 사업을 지방 정부 차원에서 조사를 행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지방 정부 차원의 조사에 있어서 중요한 점을 연구 수행자는 우선적으로 ‘기초 데이터’의 확보와 ‘기억의 전승’을 통한 관련 사실의 전파로 제시하고 싶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정책적 제언을 하고자 한다.

첫째, ‘기초 데이터’의 확보이다. 국가기록원이 소장하고 있는 강제동원 관련 자료 중 ‘제주인’ 관련 자료에 대한 ‘데이터베이스’가 시급하다. 이를 위해서는 국가기록원이 이미 제공한 자료가 아닌, 보다 업그레이드된-화질이 좋은-자료의 입수가 물론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각 자료들마다 항목에 차이를 지니고는 있지만, 성명, 본적지, 투입지, 투입시기, 투입부대, 피해 현황 등을 데이터베이스화할 경우, 보다 구체적인 ‘제주인’들의 동원실태를 파악할 수 있는 기초 자료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를 통해 현재의 국가기록원 ‘색인’에서 파악할 수 없었던, 한국 정부가 소장하고 있는 자료상에 기재된 ‘제주인’들의 정확한 인원수를 중복된 부분 제외를 통해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기억의 전승’이다. 현재 강제동원이 ‘법적으로 종료’된 지 약 80년에 가까운 오랜 시간이 경과하였기에, 강제동원을 직접 경험한 피해자들은 대부분 사망한 상태이다. 따라서 이들의 경험담을 직접 청취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들이 겪은 강제동원의 피해는 이들을 통해 이미 그들의 자손들에 일정하게 전파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물론 그 내용은 매우 한정적인 내용일 것임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해자들을 통해 그 자손들이 알고 있는 강제동원의 피해를 조사하는 작업은 ‘기억의 전승’이라는 차원에서 일정한 의의를 지닌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이는 강제동원을 알지 못하는 ‘어린 제주인’들에게 ‘우리 할아버지들이 강제동원을 통해 어떠한 고초를 겪었고, 그러한 내용들이 우리 아버지들에게 어떻게 전해졌으며, 우리는 그 이야기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전해야 하는 가’와 같은 ‘기억의 전승’ 또는 일반인 차원의 ‘역사의 계승’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기초 데이터베이스의 확보와 경험담을 토대로, ‘할아버지 제주인’들이 겪은 강제동원의 역사를 어린 학생들에게 전파할 수 있는 ‘역사 탐방 교육 프로그램 사업’도 함께 전개하는 것도 많은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한다. 이를 통해 억울하게 죽어간 재일제주인 등에 대한 역사적 소명을 통해 후손으로서 이들의 기록을 사료로 남겨서 후세에 다시는 이 같은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역사의 현장을 배우고 학습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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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Survey on the Actual Status of the Forced Mobilization of Jeju people in Japan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Focusing on Kyushu and Okinawa)

Chan-Sick Park, Kwang-Myong Ko, Jae-Wook Sim, Byung-Soo Ko,

This survey was conducted to follow and discover the traces of the first-generation Jeju people in Japan who were forcibly mobilized to Japan from Jeju Island around the end of Japanese colonial period(1939-1945), in order to provide a basic data regarding the forced mobilization to Japan and utilize such data for history education in future. The results of this survey are summarized as follows:
First, 36 places in Kyushu and Okinawa, where monuments, memorials, and cenotaphs are erected, were visited and the current status of gravestones related to Korean people in Japan was identified in order to solace the vengeful souls of the people who died miserably in those days, while conducting a field survey for 8 prefectures in Japan.
Second, this survey was carried out to collect statistical data on the forced mobilization from researchers, NGOs, officials from the Korean Residents Union in Japan, and religious people in Kyushu and Okinawa and to identify the status of the survey and research on forced mobilization under Japanese colonial rule.
Third, it was confirmed that some people from Jeju were included in the names engraved on the cornerstone of peace in Peace Memorial Park, Okinawa Prefecture.
Fourth, there was a record that a person from Jeju Island, who was forcibly mobilized from Osaka to Okinawa, died. However, it was later found that he had been captured by U.S. forces and had been alive.
Fifth, the name list of deceased industrial workers included one person from Jeju Island. The year and month of his forced mobilization, the location of his company, his name, age, family name, and permanent address were written in detail in the list.
Sixth, through the data of National Archives of Korea and Takeuchi Yasuto Book(2015), the study identified whether the name list of forcibly mobilized people included any Jeju people. It was confirmed that the names of some Jeju people were recorded in the data.
Seventh, the following facts were confirmed: There are bereaved families who have not yet found the name list of the deceased; there are undiscovered remains in Kyushu and Okinawa, Japan, and there are areas where no monument, memorials, or cenotaphs are erected related to forced mobilization.
As stated above, this study identified that a large number of Jeju people were forcibly mobilized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and that their records remained. The data on the civilians attached to the naval army in Section 5, Chapter 2 has a material significance in that the analysis and research of the data help understand the actual status of the forced mobilization that Jeju people experienced.
The results obtained from this survey will provide many implications for Korean and overseas researchers on the forced mobilization at a time when the fact that Koreans in Japan having been forcibly mobilized is recognized as an important matter.
First, analysis of the name list will provide an opportunity to understand the damage that Jeju people suffered due to forced mobilization more specifically. In order to do so, it is necessary to carry out a long-term and systematic investigation on the actual situation of the victims of forced mobilization from Jeju Island who resided in 8 regions in Japan.
Second, it was recognized that it is necessary to visit the National Archives of Korea, researchers, and Gyeongsang-won and obtain the name list of forcibly mobilized Jeju people in Japan. In this sense, this survey is meaningful in that it has partially identified and prepared the name list of forcibly mobilized Jeju people in Japan.
Third, it is necessary to copy and scan the originals of valuable documents such as national registration application and renewal application of Jeju people in Japan stored by Kyushu and Okinawa branch offices of the Korean Residents Union in Japan. This will provide an opportunity to better understand the situation related to forced mobilization.
Fourth, the reports on damage of Jeju people prepared for the compensation during the time of Roh Moo-hyun government, are presently stored in the National Archives of Korea. The copies of such reports should be provided to Jeju Province and used as valuable research materials.
Notwithstanding this importance, however, the data sent by the National Archives of Korea have many problems, as mentioned above.
First, it was impossible to identify the specific situation of the forced mobilization(assigned area, workplace, identity, etc.) of Jeju people with the relevant data because it consisted of low-capacity and poor image quality files.
Second, an ‘index’ written as ‘a total of 10,432 Jeju people’ was sent together with the data by the National Archives of Korea. However, as mentioned above, the figure in this ‘index’ included duplicates on the same data as well as various duplicate data. Thus, it has a limitation that it cannot identify the exact figure of the forced mobilized Jeju people, which is stated in the data currently stored by the Korean government agencies.
Forced mobilization, which is ‘the history of suffering’ that Koreans including Jeju people experienced in the past, is a historical event that must not be repeated. It is also an important task that must be ‘solved’ in order to establish a progressive relationship between Korea and Japan. Nevertheless, survey and research on the forced mobilization at the central government level has been suspended due to ‘South Korea-Japan Comfort Women Agreement’ which was concluded in December 2015. It is very significant to carry out a survey at the local government level for the project suspended at the central government level. In addition, the researcher should first secure ‘the basic data’ and propagate the related facts through ‘the transfer of memory’ which are important points in a survey at the local government-level.

Keyword : Japanese colonial period, Jeju people in Japan, forced mobilization, Kyushu and Okinawa, peace memorial park, history of suffering, solved, South Korea-Japan comfort women agreement, basic data, transfer of memory, history education progr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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