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4.3 70주년을 기념해 '제주4.3사건'이란 제목으로 5회 연재한다. 이 글을 쓴 고영철 님은 함덕초등학교 교장으로 정년을 맞은 제주의 역사를 연구하고 탐구하는 향토사학자이다. 현재 흥사단 부이사장을 맞는 등 시민운동에도 앞장서고 있다. 고영철 선생은 “수정할 때가 여러군데 있다”고 말했으나 국제뉴스제주본부와 제주뉴스는 4.3 70주년을 맞아 4.3의 지역화와 내면화를 확산하기 위해 5회 연재한다.

1948년 5월 5일 제주읍 미군정청에서 열린 최고수뇌회의 참석자들이 모두 등장하는 사진.

특집 4번째

◆  대규모 양민 학살의 책임자

미 군정장관 딘 소장.

① 미군정(美軍政, 주한미군사고문단)과 군정장관 딘 소장
우리 나라는 우리의 힘으로 독립을 쟁취한 것이 아니라 미군의 승리에 따른 것이었기 때문에 이 때부터 3년간은 미군이 38선 이남을 통치하게 되는데 이 시기를 미군정 시대라고 부른다. 딘(W. F. Dean) 소장은 군정을 담당한 군정장관으로서 아놀드, 러취 등을 거쳐 1947년 11월 3일자로 이 직책을 담당하게 되었다. 제주 4․3은 딘 소장이 군정장관으로 재직하고 있을 때 발발했기 때문에 4․3의 전체 과정에서 그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특히 그는 평화적으로 수습될 수도 있었던 4․3을 강경 토벌작전으로 선회케 한 장본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그는 무장대 사령관 김달삼과 토벌대 9연대장 김익렬 사이에 4․28평화회담이 성공리에 이루어진 바로 다음날인 1948년 4월 29일 극비리에 제주를 방문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의 방문 직후인 5월1일과 5월 3일에 경찰과 우익 청년단원들은 오라리 방화사건과 귀순자에 대한 발포 사건을 저지르면서 평화협정을 무위로 돌려놓았다. 게다가 미군은 오라리 방화사건을 지상과 공중에서 촬영하여 마치 이 사건이 무장대에 의해서 일어난 것처럼 조작하기도 했다.

그리고 다시 5월 5일 딘 소장은 제주를 시찰한 후 "제주도 밖에서 온 공산분자들이 일부 청년을 오도하여 산에 가서 폭동을 일으켜 관리와 선거를 지지일으켜자들을 위협 살해하고 있다"라며 4․3을 외지 공산주의자들과 연계된 폭동으로 몰아가려3을 였다. 곧 이어 그는 평화적 해결을 추진하던 김익렬 연대장을 해임하고 대신 박진경을 그 후임으로 내세워 강경 토벌 정책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딘 소장의 두 차례에 걸친 제주방문은 미국의 입장을 관철하는 데에 방해가 되는 요소를 제거하고 강경 토벌정책의 기초를 마련코자 한 것이었다. 4․3 당시 딘 소장의 행위에서도 볼 수 있듯이 진압작전 전과정을 통하여 한국정부의 군사작전 지휘권을 쥐고 있던 미국이 4․3 양민학살의 1차적 책임 소재자임을 확인할 수 있다.(이영권의 제주역사이야기 〈인물로 보는 4․3〉)
다음에 소개하는 김익렬 장군의 유고 중 일부는 미군정의 의도를 확실하게 보여 준다.

<1948년 4월 제주도 군정장관 맨스필드 대령은 미군 고위층의 명령이라고 하면서 제주읍내에 있는 미군 CIC에 내(김익렬)가 만나야 할 사람이 와 있다고 지시했다. 지시한 시간에 CIC에 가 보았더니 군정장관 딘 장군의 정치고문이라는 자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름을 밝히기를 거절한 그는 국제정세와 한국 장래 문제를 소상히 설명하고 나서 제주도 폭동이 빠른 시일 내에 진압되지 않으면 미국의 입장이 난처해지고 한국의 독립에도 유해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 일을 신속하게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초토작전이라고 강조하고 이에 대한 나의 의견을 물었다. 한마디로 ‘노’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자리를 박차 돌아 나오려고 했다.

당신도 자기의 말만 들으면 출세도 하고 부(富)도 누릴 수 있는 일생일대의 기회가 올텐데 고집만 부린다고 말했다. 인간은 뭐니뭐니해도 출세하고 부를 누리고 싶은 욕망이 있는 법이며 자기가 목적하는 행복과 이상을 달성하기 위해서도 출세와 돈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여러 차례 반복하여 설득하려고 했다. 내가 초토화작전을 감행하여 임무를 완료한 후 민족주의자들로부터 미움을 받아 한국에서 살기 어렵게 된다면 나의 가족과 친척을 데리고 미국에 이민 가 살도록 해준다고도 했다. 미국은 황금만 있으면 모든 행복을 다 누릴 수 있는 곳이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그러면서 미국생활을 소개하는 각종 잡지를 꺼내 보여주었다. 처음에는 5만 달러를 주겠다고 했다가 또 10만 달러를 주겠다고 하더니 나중에는 얼마가 필요하냐고 마치 어린아이 달래듯 하는 것이었다. 요점은 민족반역자 노릇을 하고 10만 달러를 챙기고 미국으로 도망가라는 것이다.〉(金益烈장군 실록유고 4‧3의 진실)

냉전 질서 속에 주한미군 철수 압력에 직면한 미국으로선 남한에 공산주의 방벽을 구축하는 것이 숙제였다. 10월 8일을 시작으로 고비 때마다 미군 보고서를 통해 제기된 괴선박 혹은 소련잠수함 출현설은 강경진압의 빌미를 제공했고, 법에도 없는 계엄령 선포로 한국군 수뇌부가 우와좌왕할 때 로버츠 고문단장은 국방부 총참모장에게 계엄령에 대한 문서를 보내 시행에 적극 개입했다.

1948년 7월말 딘 군정장관은 조병옥 경무부장에게 “야전훈련을 위해 제주도의국방경비대 연대들을 교체시킨다는 방침을 갖고 있다. 한 연대가 제주도에 4~6주씩 주둔할 것이다. 산간지대에서 항상 연대훈련이 이루어질 것이다.”라고 밝혔다. 이것은 제주도 사태를 경비대의 야전훈련용으로 활용한다는 비인도적(非人道的)인 방침인 것이다.(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235~236쪽)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에도 한국군에 대한 작전통제권은 주한미군사령관에게 있었다. 통제권은 상징적인 것이 아니라 매우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것이었다. 10월 9일 로버츠 고문단장이 광주 제5여단 고문관에게 보낸 공문에서는 〈제주도 작전에서 결함이 나타났으므로 미군의 노출을 가급적 줄인 상태에서 한국인 지휘 계통(제5여단)을 통해 즉각적인 수정 조치를 하라〉는 요지가 나타나 있다. 이 지시는 즉각 현실화되어 10월 11일 광주 제5여단장 김상겸 대령을 사령관으로 하는 제주도경비사령부가 창설되었다. 로버츠 고문단장은 제주도 작전에 관한 모든 상황을 제주도에 파견한 고문관 비제스 대위를 통해 보고받아 이를 다시 매주 정기적으로 주한미군사령관에게 보고했으며, 이범석 총리나 신성모 국방부장관의 군 작전에 일일이 관여했다. 또한 로버츠는 무차별 강경진압작전을 펼치고 있는 송요찬을 칭찬하거나, 미군 스스로가 과격한 반공주의자로 인식하고 있는 서북청년회를 군에 대거 투입함으로써 가혹한 작전을 조장했다.(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251~253쪽)

미국학자 브루스 커밍스 박사도 1998년 3월 14일 도쿄에서 가진 강연 및 4․3취재반과의 인터뷰에서 “韓․美 간의 비밀협약에 따라 미군은 1949년 6월까지 한국의 군대와 경찰을 지휘․통제했다. 따라서 1949년 6월말 미군이 철수할 때까지 제주섬에서 발생한 모든 학살극과 잔혹행위에 대해 미국은 단지 윤리적 책임이 아니라 실제적이고 법률적인 책임이 있다.”라고 밝혔다.(양조훈, 「제주 4․3 양민학살의 진상」 리플렛 참조)
 

이승만 전 대통령.

② 이승만(李承晩) 대통령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극과 극을 이루고 있다. 독립운동가이자 건국의 아버지로 추앙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권력욕에 눈이 멀어 민족의 분단과 동족상잔의 비극을 초래한 권세가로, 혹은 해방 정국의 양민학살에 대한 총체적 책임자로, 혹은 4․19혁명에 의해 쫓겨 난 추악한 독재자로 평가되고 있다. 이와 같은 여러 평가에도 불구하고 2000년 대한민국 국회의사당에는 그의 흉상이 세워지기도 했다. 독립운동 경력을 바탕으로 초대 대통령직을 수행한 '건국의 아버지'라는 명분에 따른 것이다. 하지만 그가 했다는 독립운동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아무런 실효도 없는 외교독립론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의 독립운동은 심지어 조선을 미국의 한 주로 편입해 달라는 수준의 매국적 활동이었다. 또 그는 독립운동 과정에서 자신의 주도권을 항상 고집하여 운동진영 내의 분란을 자주 일으켰고, 독립운동 자금 횡령 혐의로 상해임시정부 대통령직에서 파면된 경험도 있다.(http://jejuhistory.com 이영권의 제주역사이야기 〈인물로 보는 4․3〉)

1948년 10월 11일 제주도경비사령부 설치, 10월 17일 해안선 5㎞이외 지점 및 산악지대 무허가 통행금지 포고, 10월19일 여순반란사건과 서북청년단 1000명 군․경 진압작전 투입, 11월17일 이승만 대통령 계엄령 선포(이는 비밀리에 이루어졌으며 계엄사령관이 된 송요찬조차 계엄령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르고 있었다. 미군사고문단장인 로버트 준장은 12월 1일 되어서야 국방부 총참모장에게 계엄령이 무엇인지, 언제 발표할 수 있는지, 누가 발표하는지, 그 영향이 무엇인지를 숙지하라는 지시를 보냈다.)(제주일보 2003년 5월 13일) 및 1949년 1월 21일 조속한 진압을 위한 가혹한 탄압 지시 등 일련의 흐름은 당시 국내외 정세와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반민족처벌법 공포로 인한 친일파 정치기반 상실 우려에 처한 이승만으로선 반대세력 제거를 통한 정권안정, 유엔의 국가 승인과 미국의 군사․경제 원조 확보가 절실했다. 이와 같은 위기를 벗어나기 위한 최대 이슈는 반공(反共)이었다. 제주도민 집단희생의 빌미가 된 계엄령은 계엄법 자체가 없는 시점에서 선포됐다.(계엄법 제정 공포 49년 11월24일)

제주도에서 가장 큰 민원의 대상이 된 서북청년회를 제주도에 파견한 책임도 이승만에게 있다. 처음 이들이 제주도에 온 것은 3․1사건 직후 유해진 지사가 호위병 형식으로 서청단원을 활용한 것이 시초이다.

약 500~700명으로 추산되는 이들은 일정한 일자리가 없었기 때문에 태극기나 이승만 사진 등을 강매하면서 생계를 유지했으며 백색테러를 일으키기도 하여 민심을 자극하였다. 이들은 4․3사건이 일어나기 전부터 도민과 갈등을 빚어 사건 발생의 한 원인으로 지목받아왔는데 이승만과 미군은 강경진압을 앞두고 서북청년회를 아예 군경에 편입시킨 것이다. 이승만은 서청총회에 직접 참석하여 모병을 역설하기도 하였으며 서청을 군인과 경찰로 전격 교체하는 일에 앞장섰다. 서북청년회 위주로 경찰이 재편됐고, 군대에는 ‘서청중대’가 따로 편성됐다.

서울에서 서청회원 중에서 면접을 보아 글자를 아는 사람은 경찰로 그렇지 않은 사람은 군인이 됐는데, 이 때 모집 이유는 사상이 확실한 사람이라야 4․3사건을 진압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경찰로 뽑힌 200명은 경찰전문학교에 입교하여 14일간의 교육을 받고 경찰복을 입었다. 이들을 〈200명부대〉라고 불렀다.(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266~268쪽)

그는 1949년 1월 국무회의에서 󰡒미국측에서 한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많은 동정을 표하나 제주도, 전남 사건의 여파를 완전히 발근색원해야 그들의 원조는 적극화할 것이며 지방 토색 반도 및 절도 등 악당을 가혹한 방법으로 탄압해 법의 존엄을 표시할 것이 요청된다󰡓고 발언하며 강경작전을 지시한 사실이 이번 조사에서 밝혀졌다.(제민일보 2003년 3월 31일)
 

조병옥 미군정 경무부장.

③ 조병옥(趙炳玉) 미군정 경무부장
조병옥은 흔히 반독재운동에 앞장섰던 야당의 거목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제주도민에게 그리고 민족적 양심으로 현대사의 격랑을 헤쳐온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는 양민학살의 책임자로 여겨지고 있다. 조병옥은 4․3 당시 최고의 물리력을 휘둘렀던 미군정 경무부장이었다. 당시 경찰은 가장 조직적으로 훈련되고 최고의 무기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를 총괄한 사람이 바로 경무부장인 조병옥이었다. 4․3의 강경 진압 역시 조병옥의 독려에 의한 것이었다.(이영권의 제주역사이야기 〈인물로 보는 4․3〉)

그는 1947년 3월 14일, 3․1 발포사건에 대항하여 제주도의 많은 관청과 민중들이 총파업을 벌이자 급거 제주도를 방문했었다. 그는 이 날 제주도청을 방문해 “제주도 사람들은 사상적으로 불온(不穩)하다. 당신들이 조선의 건국에 저해(沮害)가 된다면 싹 쓸어버릴 수도 있다"는 비이성적인 연설을 했다. 조병옥이 했던 제주도 사람들은 사상적으로 불온하다는 의미는 그 즈음 경무부차장 최경진(崔慶進)이 했던 발언을 살펴보면 보다 명백해진다. 최경진은 제주도의 총파업을 설명하는 기자회견석에서 ”제주도 주민 90%가 좌익적 색채를 띠고 있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경무부 수뇌부의 '제주도는 붉은 섬이고, 제주도 사람들은 빨갱이다'는 선입관은 1948年 겨울에 본격적으로 그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는 5월 5일 12시에 제주중학교의 미군정청 회의실에서 미군정장관 딘 장군, 민정장관 안재홍, 경비대 총사령관 송호성 준장, 경무부장 조병옥, 제주도 군정장관 맨스필드 대령, 제주도지사 유해진, 경비대 제9연대장 김익렬 중령, 제주도 경찰감찰청장 최천(崔天), 딘 장군 전용통역관 김씨(목사출신)가 참석한 극비 대책회의에서 김익렬 중령이 경찰의 토벌작전에 실패한 까닭과 기강문란에 대하여 맨스필드 대령과 드루스 대위가 작성한 증거를 대어 지적하자 김익렬을 공산주의자로 몰아붙이고 김익렬이 5살 때 돌아가신 김익렬의 부친이 북한에서 열렬히 간부로 활약하고 있다고 하면서까지 자신의 주장을 관철했다.(金益烈장군 실록유고 4‧3의 진실)
 

남해군민공원에 있는 박진경의 동상.

③박진경(朴珍景) 제11연대장
박진경 대령은 제주 4.3 사건의 진압책임자로 1948년 5월 6일 부임하였다. 존 메릴의 논문{제주도 반란}에는 박진경의 연대장 임명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박진경이 국방경비대 사령부의 인사부에서 일하다가 9연대장으로 임명된 이유는 일제시대 일본군으로 제주도에 복무한 경험이 있어서 섬의 지형과 산악요새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미군정이 박진경을 연대장으로 임명한 이유는 인도적으로 결코 용납될 수 없고 전시에도 명령하거나 묵인한 사령관은 전범으로서 처형을 면키 힘든 초토화 작전을 충실히 수행할 연대장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제주 4․3 학습 자료 인물로 보는 4․3) 조병옥과 갈등을 겪은 김익렬을 대신하여 바로 다음 날 부임한 것이다. 아직 김익렬이 연대임시본부에 있을 때 도착했다.

박진경 중령은 연대장으로서 명령권을 가지고, 김익렬은 연대장의 고문이 됨과 동시에 작전지휘를 책임지도록 맨스필드는 명령했다. 연대장 이취임식에서나 다른 부대를 방문할 때 그는 자기 부친은 친일파들의 정치집단이었던 ‘대정익찬회(大政翼贊會)’의 중요간부였다고 소개했다. 자기는 공산주의자와는 적대관계라고 강조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나라 독립을 방해하는 제주도폭동사건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제주도민 30만을 희생시키더라도 무방하다고 했다. 그래서라도 독립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하였다. 이것은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다, 다시 말해서 초토화작전을 감행하겠다는 의지의 발표였다.

다음 날 박진경과 김익렬은 작전회의를 했는데 불과 1시간도 못 되어 의견충돌이 생겼다. 박중령은 자기의 임무수행에 방해가 되니 제주도를 떠나 달라고 하였다. 김익렬도 화가 나서 떠나달라면 떠나겠다고 내뱉고는 그 길로 총사령부로 직행하였다.(金益烈장군 실록유고 4‧3의 진실) 6월 17일에는 수많은 제주시민을 농고 운동장에 강제로 모아 놓고 "한라산 일대에 휘발유를 뿌리고 항공기로부터 소이탄을 섬 땅에 투하함으로써 방화하여 제주 빨갱이들을 몰살할 수 있다."고 연설했다.(제주민중항쟁Ⅰ 160쪽)

경비대총사령부는 1948년 5월 4일 수원에서 창설된 제11연대를 5월 15일 제주도로 이동시키면서 기존의 제9연대를 제11연대에 합편하도록 했고 초대 연대장에 박진경 중령을 임명했다. 즉, 제9연대장의 자격으로 제주도에 온 박진경 중령은 5월 15일자로 제11연대장으로 변경되었다. 제11연대는 4개 대대에 참모까지 두어 연대의 틀을 갖추었다.

그는 딘 장군의 정책을 충실히 따라 ‘무차별 체포작전’을 폈으며, 군정장관 딘 장군은 ‘성공적인 작전’으로 간주, 부임 한 달도 되지 않은 6월 1일 중령을 대령으로 특진시켰다. 선임자를 앞지른 이 진급은 딘 장군이 자기의 명령을 충실히 따른 데 대한 배려였음을 박중령의 대령 진급시 직접 제주에 와서 계급장을 달아 준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는 1948년 6월 17일 대령 진급 축하연을 마치고 잠자던 중 6월 18일 새벽 부하인 문상길 중위․손선호 하사관․신상우 하사관․배경용 하사관․양회천 이등상사․이정우 하사․강승규 하사․황주복 하사․김정도 하사 등 9명에 의해 암살당했다.

경비대 병사 41명이 집단 탈영해 무장대에 합류하는 사건이 벌어진 것도 박진경이 부임한 지 보름 정도 지난 5월 20일이었다. 탈영한 군인들 중 90%는 제주 출신이었는데 이들은 빨갱이로 취급받았기 때문에 탈영한 것이었다. 당시 제주 출신은 모두 〈모슬포대대〉라는 이름 아래 한 개의 대대를 이루고 있었는데 탈영 사건 이후 모슬포대대는 제주읍 오등리 천막에 분리시켜 토벌에 참여시키지 않았으며, 제주 실정을 모르는 다른 지역 출신 군인으로만 작전을 전개한 것은 사태를 악화시키는 하나의 배경이 되었다.(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217~218쪽)

현대사 연구가 박명림은 박진경의 토벌작전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박진경의 이러한 무차별 체포작전은 경비대의 힘을 과시함으로써 일반 민중들에게 두려움을 심어주고, 유격대와 그들을 분리시켰으며 유격대를 더욱 깊은 산 속으로 몰아넣었다는 점에서는 성공이었다. 그러나 그의 작전은 민중들이 그 때까지 갖고 있던 경비대에 대한 상대적 호감을 반감으로 전환시켰으며 경비대 내부를 동요시켰고 유격대에게 경비대도 경찰과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적이라는 인식을 심어주어 더 큰 대립과 갈등을 불러 일으켰으며, 그들은 더욱 깊은 산 속에 몰아넣음으로써 사태를 오히려 장기화시켰다는 점에서 실패였다.〉(이영권의 제주역사이야기 〈인물로 보는 4․3〉)

송요찬.

⑤ 송요찬(宋堯讚) 제주도경비사령관
박진경 연대장이 암살당하자 미군사령부는 6월 21일 연대장에 최경록 중령, 부연대장에 송요찬 소령을 임명하였다. 이들은 모두 일본군 준위 출신이다. 이들은 부임 즉시 박진경 연대장과 같은 진압작전을 폈다. 경비대는 6월 21일, 22일, 25일, 26일 잇따라 수색작전을 전개하여 253명의 폭도를 체포하였으나 노획한 총기류는 단 1정뿐이었다. 경비대총사령부는 1948년 7월 15일자로 경비대 9연대를 부활시키면서 11연대의 부연대장이었던 송요찬을 연대장으로 임명했다. 최경록 연대장의 11연대는 제주 출신인 본래의 9연대 병력만을 배속 해제한 후 7월 24일 경기도 수원으로 철수했다. 미군이 송요찬의 강인하고 용감한 점을 높이 샀기 때문에 이루어진 개편이었다. 최경록에 대해서는 주변의 신망을 받기는 하지만 온건하다고 본 것이다.(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229~234쪽)

1948년 10월 17일, 제주도 경비사령관 송요찬(제9연대장 겸임)은 ‘해안선으로부터 5Km 以上 떨어진 중산간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배(暴徒輩)로 인정하여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이어 중산간마을 주민은 해안마을로 이주하라는 소개령(疏開令)을 발동했다. 그러나 소개령이 전달된 곳은 몇 마을에 지나지 않았다. 초토화작전(焦土化作戰)은 10月 23日에 개시되었다. 당초 초토화 작전개념은 중산간마을 주민들을 해변마을로 소개(疏開)시키고 해변마을에는 주민감시체계를 구축해 무장대의 근거지를 없앤다는 것이었지만, 토벌대의 전과 올리기로 변질돼 중산간마을 대부분이 사라지고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집단총살이 이뤄졌다.

토벌대는 100여 개의 중산간마을을 불태우고 주민을 학살했다. 태워 없애고, 굶겨 없애고, 죽여 없애는 소위 빨갱이 사냥이 벌어졌다. 초토화작전 이후 다음 해 3月까지 약 5~6개월 동안에 가장 많은 주민이 학살되었다. 하퇨화작100명 이상 사살되는 경우도 흔했다. 주한미군사령부가 1949年 4月 1日 자로 발행한 <4․3 종합보고서>라는 제목의 정보참모부(G-2) 보고서는 “지난 한 해 동안 14,000~15,000名의 주민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들 중 최소한 80%가 군․경 토벌대에 의해 사살되었다" 고 하며, 주민들 대다수가 토벌대에 학살되었음을 시인하고 있다.

12월 17일 미군보고서는 ‘제9연대 진압작전의 지속적인 성공은 수준 높은 작전을 전개하려는 욕망과 제2연대 성공자들의 훌륭한 업적에 부응하려는 욕망 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순사건 진압에 공적을 세운 대전 제2연대와 맞교대를 앞둔 제9연대가 제주를 떠나기 전에 여순에 맞설 만한 업적을 세우기 위해 욕망을 표출한 것이라는 분석이다. 12월 29일 제9연대와 교체된 제2연대는 ‘적을 최후의 한 명까지 섬멸을 기하는 포위 고립화작전’을 실시했다.

유재홍.

⑥ 유재흥 제주도지구전투사령관
1921년 유승렬의 아들로 일본 나고야에서 출생하였고 다섯살 때 조선으로 돌아와 충청남도 공주에서 성장했다. 평안북도 신의주고등보통학교, 일본 육군사관학교(제55기)를 졸업했고, 태평양 전쟁 종전 당시에는 일본군 육군 대위로 근무하고 있었다.(위키백과) 江本載興으로 창씨개명했다.

대한민국 군번 3번인 유재흥 장군은 2대에 걸친 ‘부자 친일 장교’다. 일본 육사(55기)를 나온 유 장군은 1943년 이광수·최남선 등과 함께 일본 메이지대학에서 조선인 학병 지원을 촉구하는 연설을 했다.( 111129) 1943년 11월 14일 상부의 지시로 도쿄의 메이지대학(明治大學) 강당에서 열린 ‘특별지원병 궐기대회’에서 이광수·최남선과 함께 조선인 학병지원을 촉구하는 연설을 했다. 자신은 일본 육사를 나온 중위로서 아침저녁으로 천황을 지키고 있다고 소개하고, ‘지금 우리 조선인은 우리의 가치를 일본인에게 충분히 인식시킬 기회’이며 ‘이 시국에 일본 군대 장교로서 능력을 가진 조선인 학생들이 군에 들어가 밑에 거느린 일본 병정들을 가르쳐 주면서 임무를 완수하면 그 성과는 조선인을 위한 일이 될 것’이라고 군 입대를 종용했다. 같은 해 보병 대위로 진급했고 박격대(迫擊隊) 대장을 맡았다.(친일인명사전)

미군정 시기에 군사영어학교를 거쳐 대한민국 국군 장교가 되었다. 제4여단장, 육군사관학교 부교장 등을 지냈고, 1949년 제주도지구 전투사령관에 임명되어 제주 4·3 사건에 관여하였다.(위키백과) 그의 초기 공적(?)은 제주에서의 4.3항쟁 진압이었다. 당시 유재흥은 2345명의 유격대와 1608명의 민간인을 살해했다. 이조차 한참 축소된 것이고 보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민간인을 학살했는지 감히 추측조차 할 수 없다.(http://vienna-jungdong.com/비엔나정동커뮤니티) 2,345명의 유격대라고 한 것도 대부분(90% 이상) 민간인이다. 4・3 때 무장대는 모두 합쳐도 500명을 넘지 않았다. 2011년 사망하여 국립현충원에 묻혔다.

반면, 본인은 제주도민을 보호했다고 주장하였다. 류주헌은 블로그를 통해 ‘유재흥 장군, 낙동강 방어전의 영웅’이란 제하의 글에서 유재흥이 “제주 전투사령관 시절 도내에서 횡포가 심한 서북청년단을 견제하고 도민들을 보호하는 데 애썼다고 《격동의 세월》에서 밝힌 바 있다”고 썼다.(http://blog.daum.net/ryu3314/뿌리공부 111130) 이후 한국전쟁 당시 군단장으로서 군단을 해체할 정도의 패전을 거듭해북한군 최고의 명장 유재흥이라고 불린다.

총사령부에서는 1949년 3월 2일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를 설치하고 사령관에 육사 부교장 유재흥 대령을 임명하고 참모장에 제2연대장 함병선 중령을 겸임 보직했다. 이에 더해 김용주 소령의 독립유격대대를 투입하여 적극적인 소탕 작전을 전개하게 되었다. 유재흥 사령관에게는 기존에 제주에 주둔하고 있던 2연대와 유격 대대 병력 외에 제주도 경찰과 응원 경찰, 우익 청년단 등을 통합, 지휘하는 권한이 부여되었다.

응원 경찰인 경찰 특별 부대[사령관 김태일 경무관]은 이미 2월 19일 505명이 파견되어 있었다. 미군 정보 보고에 의하면 1949년 4월 1일 현재 유재흥 사령관이 지휘하는 토벌대는 한국군 2,622명, 경찰 1,700명, 민보단 약 5만 명으로 편성돼 있었다.

또한 육군 본부는 해상 봉쇄를 위해 해군의 제3특무정대[사령관 남상휘 중령]를 지원받아 육·해·군 합동 작전을 펴도록 했다. 선거를 치른 후 5월 15일 해체되었다. 제주도 지구 전투 사령부가 설치된 기간은 1949년 3월 2일부터 5월 15일까지이지만, 유재흥 사령관은 3월 마지막 주에야 제주에 도착해 지휘권을 잡았다. 따라서 작전 기간은 제2연대장 함병선이 주도한 제1기[3월 2일~3월 마지막 주]와 유재흥 사령관이 제주에 도착해 작전을 지휘한 제2기[3월 마지막 주~5월 15일]로 나눌 수 있다.

제2연대장 함병선은 서귀중학교에서 국민학교 직원, 중학교 직원, 면과 군 직원, 청년단 간부들에게 1개월의 군사 훈련을 실시하였다. 이들은 군 1개 분대, 경찰 1개 분대, 민보단 25명으로 1개 소대를 편성하여 소위 ‘하찌마끼도로’[일본군이 한라산을 요새화하기 위하여 개설한 전술 도로]를 이용한 침투 작전도 전개했다.

국방부의 종합 전과에 따르면 제2연대장 함병선이 3월 1일부터 말일까지 일대 섬멸전을 펼친 결과 이 기간에 사살 821명, 생포 999명 등이 있었는데, 이들 피살자와 포로 중에는 목숨을 구하기 위해 산으로 피난했던 다수의 민간인이 포함되어 있었다.

3월 마지막 주에 제주에 도착한 유재흥 사령관은 그때까지 해안 마을에 주둔하고 있던 병력을 산악 지역으로 전진 배치하여 남아 있는 무장대의 체포에 주력하는 한편, 2만 명 가량의 민간인이 산중에 피난해 있는 걸로 보고 이들을 하산시키기 위한 대대적인 선무 활동을 벌였다. 공중에서 선무 전단[삐라]을 살포하고 공작원을 파견하는 등 적극적인 선무 활동 결과 대부분의 민간인이 귀순했다. 하지만 귀순한 민간인 중 청년층 등 상당수는 군사 재판을 받아 사형이 집행되거나 형무소로 이송됐다.(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Ⅳ

===>계속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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