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출처=NHK방송 캡처).
(사진출처=NHK방송 캡처).

제78주년 광복절을 맞아 전범국이자 피해국인 일본 정부의 전향적인 태평양전쟁에 대한 사과와 참회는 없고 일본내 분위기는 TV방송 등에 종전의 날에 포커스를 맞춰 방송을 하고 있었다. 

일본 효고현 아이오시 하리마조선소 전경. 노동력 착취 역사의 현장속에 일본 주민들이 한가로히 낚시를 즐기는 모습.(사진제공=고병수 기자)
일본 효고현 아이오시 하리마조선소 전경. 노동력 착취 역사의 현장속에 일본 주민들이 한가로히 낚시를 즐기는 모습.(사진제공=고병수 기자)

제주뉴스는 “조선인노동자에관한조사결과” 377명 제주인 중 하리마조선소(播磨造船所)에 66% 249명 투입된 일제강점기 최대 희생지역 중 한 지역인 전쟁을 위한 군함을 만들 던 하리마 조선소가 있는 일본 효고현 아이오시(相生시)를 직접 찾아 제주인들의 처참한 노동력 착취 등을 현장에서 찾으려 노력했고 취재했다.

노동력을 착취한 제주인 249명 중 본적지를 보면 제주 65명, 한림 61명, 애월 42명, 남원, 대정, 중문 등도 20명 이상 동원되어 힘든 노동에 시달렸다,

힘든 노동과 한 가정이 파괴된 완전한 몰락의 사례를 보면 일제강점기 때 강제연행되어 해군 군속으로 태평양전쟁에 간접적으로 참여한 신촌리 출신 A씨는 일본 효고현 하리마조선소에서 군속으로 전쟁에 참여해 미군의 공습에 사망했다. 

또한 A씨는 아들이 한 명 있었으나 4.3에서 경찰과 군경에 감언이설에 속아 자수과정에서 트럭을 타고 가다 총살당할 것이란 전언에 트럭에서 뛰어내린 수십명중 한명으로 군인들의 총탄에 의해 숨졌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에 A씨 가족은 가정이 파괴되고 후사도 없어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직계는 전부 사라지고 방계가족은 있으나 이마저도 등을 돌려 비참하게 됐다.

이처럼 일제의 강제동원 중 제주인들의 노동력을 착취한 하리마조선소 노동자 중 한국인 집단거주지는 취재결과 아이오시 중심지역인 상점가 근처 학교 위쪽 산쪽 화장터 옆에 거주해 거주부터 차별을 받은 것으로 확인됐다. 

지역 연구자인 M씨(73. 남)는 “어른들이 (아이오시) 수로 건너 조선인 마을로 들어가지 말라”고 해 한국인에 대한 차별이 있었음을 인정했다.

차별에 대해 M씨는 “한국인들 열심히 살았다. 차별에 대해 좋지 않은 생각을 한다”며 “우리의 세대는 그런 생각이 없는데 윗세대에는 있었다”고 밝혔다.

M씨는 “한국인들은 거주지역에서 밀주를 만들어 팔아 경찰이 오고 가기도 했으나 나중에 전쟁 중이라 일본인들도 밀주를 마시러 왔었다”고 전했다.

한국을 보는 시각에 대해 그는 “1970년 후반 (일본내)남북한(민단과 조총련)이 합동 퍼레이드를 벌여 놀랐다”고 증언했다.

이 지역은 하리마 조선소에서 차로 10분거리로 1945년 당시에는 4만명이 거주했으나 조선업의 위축 등으로 현재 3만의 소도시로 지역의 재건을 위해 일본 지자체가 노력하고 있었다.

표지석 모습.(사진제공=고병수 기자)
표지석 모습.(사진제공=고병수 기자)
플라타너스 가로수 모습.
플라타너스 가로수 모습.

특히 아이오시내에 일제강점기 한국인들 중 고맙다는 표시로 플라타너스 나무를 지역에 기증해 이에 대한 유례를 담은 표지석을 세워 지역에 알리고 있었다.

표지석의 내용을 보면 “태평양 전쟁 등 강제연행 등으로 조선소로 강제연행(끌려온)된 한국인들이 전후 조국으로 돌아갈 때(1959년) 신세를 진 일본사람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담아 플라타나스 나무를 심었다”고 적혀 있었다.

노동력 착취를 위한 집단거주지는 여기저기 있었으나 아이오시 이 지역이 규모가 가장 컸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사진 아래 오른쪽 산쪽 화장터 옆이 강제동원된 한국인들의 집단거주지. 이 사진은 지역연구가 Y씨가 제공한 것을 재촬영함.(사진제공=고병수 기자)
사진 아래 오른쪽 산쪽 화장터 옆이 강제동원된 한국인들의 집단거주지. 이 사진은 지역연구가 Y씨가 제공한 것을 재촬영함.(사진제공=고병수 기자)

또 다른 지역 연구가 Y씨(73. 남)에 따르면 강제동원된 한국인은 2천200명 정도가 집단 거주됐고 강제동원 이전에 조선소에 근무하는 100명과 일본노동자는 분리해 거주지가 정해졌다고 밝혔다.

또한 효고현 아이오시 시립 공동묘지내에 조선인 무연고묘가 있었다. 태평양전쟁 중 여러 사유로 사망한 한국인들을 위해 한 불교사찰에서 관리했고 무연묘로 옮겼으나 자료는 없고 관리했던 사찰을 방문했으나 주지 스님이 바쁜 이유로 차후에 연락해 이름과 본적 등을 확인하기로 했다.

한편 제주인들이 이 지역에서 노동력 착취와 차별 등을 받은 현장을 취재하며 일제의 만행에 대해 일본정부의 공식적인 사과와 참회 등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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