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까지 탐라국 기능 일부 유지 조선시대들어 가혹하리만큼 도민에 대한 조선왕조 탄압아닌 탄압 제주인 대탈출과 함께 강인한 정신 심어져
세종때 이상기후로 인한 재해 빈번...최소 1천450여 명 제주인 평안도 등지로 강제이주
조선 전기 제주인 대거 육지로 도망 ‘두무악’ 집단 이루며 해양활동 전개...국내는 물론 중국까지 진출

 이상기후 등으로 인한 자연재난으로 제주의 강인한 정신이 무르익었으며 특히 제주의 불의에 저항하는 정신은 조선 세종시대부터 키워져 제주도민의 정신적 문화로 계승되게 됐다는 역사적 사실이 드러났다.

김오진 박사의 '조선시대 제주도의 이상기후와 문화'이야기에 따르면 세종은 제주도의 과잉인구압을 낮추기 위해 우리나라 최북단인 압록강, 두만강 변방지대로 이주하는록 하는 냉혹한 정책을 펼쳤다.

육지부로의 출륙금지령도 200여 년간 지속되어 순조 1823년 2월 24일 해제됐고 제주도는 남자가 귀해 여자까지도 군역을 담당하게 했다. 또한 국가의 수탈에 시달리면서 잣성 축조에 동원됐던 제주인들의 고충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이처럼 고려시대까지 탐라국의 기능이 일부 유지되었으나 조선시대들어 가혹하리만큼 제주도민들에 대한 조선왕조의 탄압아닌 탄압으로 제주인들의 대탈출과 함께 강인한 정신이 심어졌다는 지적이다.

세종 때 제주도는 이상기후로 재해와 기근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세종실록의 기사에 따르면 세종 즉위년(1418) 7월 27일 대풍우가 엄습해 제주 읍성의 동문과 관가, 민가들이 많이 무너졌다. 나무들이 뿌리째 뽑히고, 많은 선박들이 떠내려가고 부서졌다. 대정현과 정의현도 역시 큰 피해를 입었다.

세종 3년(1421)에는 눈이 5, 6척이나 쌓이는 폭설로 말이 많이 얼어 죽었다. 이는 적설량이 150~180cm 될 정도로 많은 양이다. 기후가 온난해 우마를 방목해도 죽는 경우가 많지 않은데 이 해는 폭설로 많은 피해를 입었다.

이상기후로 인한 재해는 세종 10년(1428), 세종 15년(1433), 세종 16년(1434)에도 발생했다.

바다에서도 이상기후로 해난사고가 많이 발생했다. 세종 1년(1419)에 진상선 7척이 침몰해 40여 명이 익사하는 사고가 발생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에 제주도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는 이상기후와 기근 때문에 구휼곡을 장만해 보내는 것도 문제였다.

세종은 제주도의 과잉인구압을 낮추기 위해 농업생산력을 증대시키거나 구황제도를 정비해 기근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국가의 목마사업을 방해하는 제주인들을 강제 이주시켜 인구를 낮춰 제주의 만성적인 식량부족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세종 16년(1434) 6월 14일 조정회의에서 토지와 일자리가 없는 양민들과 노비들을 자원 모집해 이주하는 자원사민 정책을 택했다. 우리나라 최남단에서 최북단인 압록강, 두만강 변방지대로 자원 이주하는 것은 제주인들에게 두려운 선택이었다.

제주인들의 지원이 저조하자 조정은 범죄자를 색출해 강제 이주시키는 정책으로 전환했다. 그 대상은 국가의 허락 없이 우마를 도축한 사람들이었다. 조정은 이들을 우마적(牛馬賊)이라 칭하며 색출해 강제 이주시켰다.

세종 18년 6월 20일 기사를 보면 우마적 800명을 추가로 색출해 강제 이주시키고 있다. 우마적은 중범죄자였기 때문에 연좌제가 적용되어 그 가족까지 끌려갔다. 우마적의 가족까지 합치면 대단한 숫자일 것이다.

그들은 제주해협을 건너 전라도 해안지방에 하선한 후 압록강, 두만강 변경지대까지 걸어서 이동했다. 노인과 아이들을 업고서 길을 갔다. 도중에 굶주리고 추위에 얼어 죽는 자가 얼마인지 모를 정도로 많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동 중 사망자가 매우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세종 때 사민정책으로 최소한 1천450여 명의 제주인들이 평안도 등지로 강제이주 당했다.

연좌되어 강제이주 당한 우마적의 가족과 탄압을 피해 도외로 탈출한 유민, 그리고 이동 중 선박 침몰로 인한 사망자 등 미기록자를 합치면 그 숫자는 대폭 증가할 것이다.

과거 제주도는 탐라국이라 불리며 천여 년 동안 독립 해상왕국을 유지했다. 고려 때 탐라가 예속되었지만 자치적인 성격이 강했다. 중앙에서 관리를 파견했으나, 실질적으로는 제주도의 토착 지도자인 성주(星主)와 왕자(王子)가 다스렸다.

조선이 건국되면서 이러한 탐라의 전통은 무시됐다. 태종은 고려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오던 성주와 왕자를 좌도지관, 우도지관으로 임명하여 그지위를 중앙의 명에 따르는 지방 관리로 격하시켰다. 세종 때는 이 제도마저 폐지하면서 탐라국의 역사와 전통을 지우려고 했다.

이와 함께 성종실록에 따르면 목장을 확대하면서 한라산을 중심으로 3중 구조의 잣성을 쌓았다. 한라산 쪽으로는 상잣성, 해안가 쪽으로는 하잣성, 그 사이는 중잣성을 만들었다. 기후재해와 기근에 허덕이고, 국가의 수탈에 시달리면서 잣성 축조에 동원되었던 제주인들의 고충을 짐작할 만하다.

이 같은 상황에 따라 조선 전기에 제주인들은 대거 육지로 도망가서 ‘두무악’ 집단을 이루며 해양활동을 전개했다.

육지로 출륙한 제주인들을 ‘두무악(頭無岳)’이라 불렀다. 두무악은 한라산과 오름의 별칭으로 산의 정상부가 뾰족하지 않아 머리가 없다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두독(頭禿)’, ‘두모악(頭毛岳)’, ‘두독야지(豆禿也只)’ 등도 두무악의 별칭이다.

두무악은 국내에서만 활동했던 것이 아니고 주변국 도서지역으로도 진출했다. 그 대표적인 곳이 요동반도 근해에 있는 70여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장산군도(長山群島)이다. 성종 23년에 의금부는 장산군도의 해랑도에 들어갔다.

중종 5년 6월 25일 기사를 보면 김해의 ‘도요저리’라는 두무악 마을이 있는데 거기에 사는 제주인은 1천여 명이나 되었다. 우리나라 해안 곳곳에 크고 작은 두무악촌(頭無岳村)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당시 제주인들의 엑소더스(exodus)는 하나의 사회현상이었다.

조선수군이 두목악에 패배하는 일도 벌어져 조직적인 집단이었다.

또한 제주도는 남자가 귀해서 여자까지도 군역을 담당했는데 이른바 여정(女丁)이 그것이다. 제주성만 해도 남정(男丁)이 500명이고 여정이 800명으로 오히려 여정이 많았다.

200여 년간 지속되었던 출륙금지령이 순조 1823년 2월24일  해제됐다.

출륙금지령은 제주인들에게 족쇄로 작용했다. 해양을 통해 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는 기회를 장기간 박탈해 버렸다. 탐라국 이래로 바다를 누비면서 해양 활동을 전개했던 제주인들의 활동공간을 섬으로만 국한시켜 버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재해와 흉년으로 식량이 고갈될 때 제주인들은 바다를 통해 주변 지역으로 나가 교역활동을 하면서 먹거리를 구해왔던 활동이 통제됐다.
 
이상기후로 농사를 그르쳐 식량이 고갈되면 정부의 구휼에만 의존하는 취약한 지역구조로 고착화되어 버렸다. 제주도의 자생적 하부구조가 붕괴되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저작권자 © 제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