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실록 1년 사이 제주도 인구의 23% 감소...사망자 대부분 아사자 한 해 제주인 4명 중 1명이 굶어 죽은 셈
김만덕 제주 산지포구 객주 열어 제주도에서 손꼽히는 부호...평생 모은 전 재산 육지의 쌀 사다 아사 직전의 제주인들 구제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 조선 역사상 최고의 여성 CEO

과거 조선시대 제주에는 이상기후로 인해 심각한 기후재해가 발생하면 기근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고 이것이 죽음의 공포로 이어졌다.

제주도는 기후재해가 빈번하게 발생해 그로 인해 조선 500여 년 동안 제주도에서는 크고 작은 기근이 반복되었지만 유독 심한 시기가 있다. 사료를 분석해 본 결과 현종시기 1670~1672년, 숙종시기 1713~1717년, 정조시기 1792~1795년의 기근이 특히 심해 제주의 3대 기근으로 불리고 있다.

이때의 기근은 전쟁보다 더 참혹했고, 제주인들은 굶주림과 전염병으로 떼죽음을 당했다. 기후재앙으로 인해 제주도에 죽음의 공포가 휩쓸고 지나갔다.

- 경임대기근(1670~1672)
현종 11년(1670) 경술년에 발생해 신해년(1671)까지 2년 동안 지속되면서 우리나라에 큰 피해를 입힌 대기근을 경신대기근이라 한다.

경신대기근은 조선시대 최악의 기근으로 잘 알려져 있다. 제주도에서도 경신대기근 기간에 기근과 전염병이 휩쓸면서 큰 피해를 입었다. 육지는 2년간 그 기근이 진행됐는데 제주도는 한해 더해 임자년(1672)까지 3년간 계속됐다.

현종실록에 따르면 제주도에 굶주려 죽은 백성의 수가 무려 2천260여 명이나 되고 남은 자도 이미 귀신 꼴이 되었다. 닭과 개를 거의 다 잡아먹었기에 경내에 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마소까지 잡아먹으면서 경각에 달린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 사람끼리 잡아먹는 변이 조석에 닥쳤다.

제주도에서는 언제 닥칠지 모르는 이상기후로 인한 흉년에 대비해 자체적으로 창고를 설치해 운영하고 있었다. 각 읍 창고에 곡식 8천 석이 저장되어 있었지만, 이것으로 제주도 기민을 구제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조정은 남해안 연해 지역에 저장된 곡물들을 수송해 제주도의 기민들을 구제하도록 했다.

제주인들은 식량이 떨어지고 구휼곡은 도착하지 않자 우마를 잡아먹으면 서라도 목숨을 지탱했다. 조정은 제주인들이 말을 나라에 바치면 전라도와 경상도의 둔전 곡식으로 교환해 주도록 했다.

1670년부터 1671년 말까지 정부는 지속적으로 제주도 기민을 구제하기 위해 구휼 정책을 펼쳤다.

- 계정대기근(1713~1717)
조선은 500년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대기근을 두 차례나 겪었다. 현종 때 경신대기근(1670~1671)과 숙종 때 을병대기근(1695~1696)이다. 경신대기근은 한반도 전역을 강타했고, 제주도는 육지에 비해 그 피해가 더 컸다.

을병대기근 때 제주도의 기민은 1만1천139명이지만, 계정대기근 때 기민은 4만7천여 명이었고 사망자도 상당수 발생했다. 1713년부터 1717년까지 지원된 곡식의 총량은 약 20만 석이었다. 이로 미루어 보아 제주도는 을병대기근에 비해 계정대기근이 더 심각했음을 알 수 있다.
 
계사년(1713)부터 정유년(1717)까지 5년 동안 계속된 ‘계정대기근’은 초대형 태풍으로 시작됐다. 그때 조정에서 논의된 내용을 보면 숙종실록에 “제주·대정·정의에 대풍이 불고 폭우가 와 바다와 산을 뒤흔들어 나무가 부러지고 집이 무너졌다. 무너진 인가가 2천여 호나 되고 사람 또한 많이 압사하고, 우마 4백여 필이 죽었다” 하니, 왕이 명하기를 “압사한 사람에게는 휼전을 거행하도록 하라, 한 섬에서 입은 재해가 이처럼 혹심하니, 목사가 순심(巡審)해 장문하기를 기다려 즉시 곡식을 옮겨서 구제해 살릴 터전을 삼도록 하라”고 했다.

민진원이 아뢴 것을 보면 계정대기근 때 제주도로 이전된 곡식은 20만석에 가까웠다. 호남과 경청(京廳)에 있는 창고가 다 비어버리고 곡물이 바닥나버릴 정도라고 하니 계정대기근의 심각성을 알 수 있다.
 
- 임을대기근(1792~1795)
정조 재위 기간에 제주도는 이상기후로 인해 여러 차례 기후재해가 발생했다. 특히 임자년(1792)부터 을묘년(1795)까지의 ‘임을대기근’ 때 재해와 기근이 심했다. 임을대기근 발생 전해인 1791년의 상황도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갑인년 태풍으로 제주목의 78개 리(里) 중에 피해가 극심한 마을은 32개이고, 대정현과 정의현 모든 마을이 심하게 피해를 입었다.

태풍으로 집이 허물어져 의지할 데 없는 백성들은 관아나 토굴에 머물고 있고, 굶주린 백성들에게 죽을 먹이면서 살려내고 있다. 심각한 기근 가운데서도 그나마 살 것 같은 성한 사람은 3만4천918명이고 아사 직전의 위급한 사람은 2만4천780명이었다. 이때의 제주도 인구는 총 6만2천698명이었다.

조정 회의에서 우의정의 보고에 따르면 1794년의 제주인구는 6만2천698명이다. 이것은 1794년에 제주목사가 보고한 인구와 일치한다. 그러나 1795년의 인구는 4만7천735명이다.

정조실록에서는 1만7천963명이 줄었다고 했는데, 계산착오에 의한 오기(誤記)이다. 6만2천698명에서 4만7천735명을 빼면 1만4천963명이다. 1년 사이에 제주도 인구의 23%가 감소했던 것이다.

사망자 대부분은 아사자였고 한 해에 제주인 4명 중 1명이 굶어 죽은 셈이다.

전라도 관찰사의 치계는 여러 해 동안 계속된 기근과 정부의 구제 노력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전라도 연해 지역의 백성들도 제주지역에 곡물을 지원하고 수송하느라 고생을 많이 했음을 알 수 있다. 갑인년 태풍이 발생했던 1794년부터 1796년까지 3년 동안 제주도에 이송된 구휼곡의 총량은 5만3천500석이었다.

1792년과 1793년의 구휼곡 2만2천182석을 합치면 임을대기근 동안 제주도로 이송된 곡물은 최소 7만5천682석이었다. 정조가 특별히 내린 하사금으로 매입한 곡식까지 포함하면 더 많을 것이다. 또한 김만덕과 토착관리들이 기부한 구휼곡도 많이 있다.

정조는 평생 모은 재산을 기부해 제주도 기민을 구제하는 데 앞장섰던 여성 거상 김만덕에게도 상을 주려고 제주목사에게 유지(諭旨)를 내렸다.

김만덕의 여걸다운 풍모를 엿볼 수 있다. 이를 전해들은 정조는 쾌히 허락하고 궁궐로 불러들어 상을 내렸다. 당시 제주인들은 출륙금지령으로 육지로 나갈 수 없었다. 특히 평민 여자는 입궐조차 할 수없었다.

정조는 김만덕을 서울로 오게 하여 내의원의 의녀반수(醫女班首)라는 벼슬을 내리고 입궐하게 했다. 수많은 대신들과 궁인들이 보는 앞에서 큰 상을 주었다.

정조실록에 따르면 제주의 만덕은 재물을 풀어서 굶주리는 백성들의 목숨을 구했다고 목사가 보고했다. 상을 주려고 하자, 만덕은 사양하면서 바다를 건너 상경해 금강산을 유람하기를 원했다. 임금은 이를 허락해 주고, 그가 통과하는 연로의 고을들로 하여금 양식을 지급하게 했다.

김만덕은 제주의 산지포구에서 객주를 열어 육지 상인들과 장사를 하여 제주도에서 손꼽히는 부호가 되었다. 여성 사업가가 많지 않았던 당시에 사업으로 평생 모은 전 재산을 가지고 육지의 쌀을 사다가 아사 직전의 제주인들을 구제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조선 역사상 최고의 여성 CEO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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