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난사고 18세기 58건, 15세기 31건, 19세기 26건 순
귀환..중국 31건, 일본 22건, 유구 9건, 베트남 1건
외국인 제주 표착 99건...中 53건 日 21건, 유구 14건, 유럽 3건, 베트남 1건, 필리핀 1건
제주 적은 인구 규모 비해 역과 조세, 공납 과다 부과...불의저항 뿌리깊은 제주 저항정신 이때부터 정체성 고착

제주도는 이상기후 등으로 인해 조선시대에 해난사고 기록 건수는 총 152건으로 나타났다. 이는 ‘조선왕조실록’ 및 ‘비변사등록’, ‘탐라기년’ 등을 분석한 결과다.

그중 18세기에 58건으로 가장 많았고, 15세기 31건, 19세기 26건, 16세기 23건, 17세기 14건 순이다. 17세기는 제주도에서 이상기후가 가장 빈번했던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해난사고 기록 건수는 가장 적다.

제주도 인근 해역에서 이상기후로 표류하다 주변국에 도착해 극적으로 돌아오는 사례가 많았다.

‘조선왕조실록’, ‘탐라기년’, ‘비변사등록’ 등을 바탕으로 귀환 건수를 분석해 보면 총 63건이다. 그중 중국에서의 귀환이 31건으로 가장 많고, 일본에서 22건, 유구(오키나와)에서 9건, 안남(베트남)에서 1건이다. 이를 비율로 보면 중국에서 귀환은 49%, 일본 35%, 유구에서 14%이다.

또한 외국인이 제주도에 표착한 기록은 총 99건이다. 19세기에 37건으로 가장 많고, 18세기에 29건, 17세기에 19건, 15세기에 7건, 16세기에 7건이다.

이는 ‘조선왕조실록’, ‘탐라기년’, ‘비변사등록’, ‘승정원일기’ 등의 기록의 결과다.

표착한 외국인을 국적별로 보면 중국인이 53건으로 가장 많고 일본인 21건, 유구인(오끼나와) 14건, 유럽인 3건, 안남(베트남)인 1건, 여송인(필리핀) 1건이며 국적 불명은 6건이다. 외국인의 표착 건수를 비율을 보면, 중국인이 54%로 가장 많고, 일본인 21%, 유구인 14%이다.

외국인들은 제주도 근해를 통과하다 태풍이나 폭풍을 만나 제주도에 표착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와 함께 제주도를 출항해 타지로 가는 도중 예기치 못한 폭풍과 역풍으로 표류하다가 타국에 구사일생으로 표착해 돌아온 사례들이 비일비재하다. 그중 중국에 표류했다가 돌아온 대표적인 사례가 최부 일행이다.

유구왕국에 표류했다가 돌아온 대표적인 예는 김비의 일행이다. 성종 8년(1477) 2월 김비의 일행 8명은 진상용 감귤을 싣고 출항했다가 역풍을 만나 14일 동안 표류하다 유구국에 표착한 후 일본과 대마도를 거쳐 돌아왔다.

제주도에서 안남(베트남)까지 표류했다가 돌아온 사례도 있다. 김대황 등 24명은 진상마 3필을 싣고 육지로 가다가 추자도 앞에서 표류하기 시작해 31일 만에 베트남 회안부에 표착했다.

제주도는 동아시아 해상의 중심에 있기 때문에 외국인들도 많이 표착했다

외국인들이 제주도 근해를 항해하다 표착해 잘 알려진 대표적인 사례가 하멜 일행이다.

한편 제주는 적은 인구 규모에 비해 역과 조세, 공납을 많이 부과했다. 우마, 귤, 약재, 옥돔, 전복, 미역, 목재, 열매, 산짐승 등의 진상 공물은 물론이고 지방 관아에 음식을 바치는 지공(支供)이 있었다. 또한 6고역이라 부르는 역도 있었다.

이중 포작역을 내야 하는 포작인(어부)들은 이에 견디다 못해 도외로 도망하는 일이 자주 발생했다.

거기에다 군역도 부담해야 했기 때문에 제주인들은 1인 다역을 겸하는 상황이었다. 60세 이상의 노인도 역을 면하기 어려웠다. 심지어 어린아이도 역을 부담해야 했다. 남정이 모자라면 여자 역시 군역까지 져야 했다.

특히 해양활동이 위축되었기 때문으로 정부의 가혹한 수탈과 빈번한 기근으로 민생이 어려워지자 제주인들은 대거 육지와 주변국으로 도망갔다. 이를 막고자 1629년에 제주인들이 도외 출륙과 해상활동을 통제하는 ‘출륙금지령’을 내렸다. 

이는 조선왕조의 제주인들에 대한 과도한 세금과 육지부와의 차등 정책 등으로 아예 고향을 떠나 육지와 주변국 등으로 떠나는 경우도 많아 불의에 저항하는 뿌리깊은 제주의 저항 정신이 이때부터 제주인의 정체성으로 고착됐다는 해석과 예측이 가능하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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