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이상기후 연구 동향

1) 외국
사료에 의한 고기후 연구는 기록물에 의존하기 때문에 연구의 범위가 제한적이지만 과거의 기후를 복원하는 데 귀중한 정보를 제공해 준다. 기상관측기기를 이용하여 측정된 관측기록은 비교적 짧은 기간에만 적용된다.

일부 관측소는 300년간 관측이 이루어지기도 했지만, 대부분 관측소에서 행해진 관측역사는 100년 미만이다. 관측시대 초기의 측정치는 일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정기적으로 관측하지 않았기 때문에 현대 표준 관측소의 객관적 기준에 의한 관측치와 비교 분석하는 것은 쉽지 않다(Lamb, 1995).
대항해시대 이후 기후에 관한 기록들은 고기후 연구에 많이 활용되고 있으며, 특히 소빙기에 관한 연구는 전 세계적으로 많이 축적되어 있어 고기후 연구를 풍부하게 하고 있다. 소빙기의 극심한 기후변동에 가장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분야는 농업이다.

Pfister et al.(1999)은 건초의 생산 시기, 곡물 및포도의 수확 시기, 경매 일자 등을 가지고 소빙기의 기후를 분석했으며, Bau�ernfeind and Woitek(1999)은 기후변동에 따른 곡물 가격의 등락을 분석하고 기후가 악화되는 시기에는 곡물가격이 상승했음을 상세히 밝혔다.

Landsteiner(1999)는 16세기 후반 중부 유럽의 포도주 생산을 기후변동과 관련지어 분석했다. 그에 따르면 1550~1630년간 계속적인 기온하강은 포도주 생산량을 감소시켰고, 포도주 경제에 의존하는 사회계층과 합스부르크왕가(The House of Hapsburg)는 세입에 큰 영향을 받았다. 16세기에서 19세기까지의 유럽기후는 전반적으로 1901~1960년 사이의 평균기온보다 낮았고 폭풍우와 대홍수가 빈번하게 발생했다.

잦은 이상기후로 호밀 가격이 폭등했고 포도주 생산은 급감했으며, 마녀사냥은 소빙기 기후변동과 깊은 관련이 있다(Pfister and Brazdil, 1999). 마녀사냥은 14세기부터 시작되어 17세기
에 전성기였고, 18세기에 사라졌다. 당시 유럽사회는 악마적 마법이 존재한다고 믿고 있었다. 소빙기 때의 잦은 이상기후를 마녀들의 음모라고 인식하기도 했다. 마녀들이 폭풍우, 한파, 가뭄 등 기상이변과 기근을 일으키고 있다고 간주하여, 소빙기 절정기인 17세기 유럽사회는 마녀사냥이 최고조에 달했다(Behringer, W., 1999).

관측시대 초기의 관측기록 자료는 단편적이고 측정 장소, 관찰시간 등이 일정치 않아 기후변동을 분석하기에 어려운 면이 있다. 일기, 연감, 신문과 같은 정기간행물은 불명확한 관측기록 자료보다 지리학적으로 더 세밀하고 가치가 있을 수 있다. Baron(1992)은 일지, 연감, 신문 등 정기간행물과 18세기 초부터 온도계와 기압계가 설치된 하버드(Harvard), 캠브리지(Cambridge), 매사추세츠(Massachusetts) 대학의 관측 자료를 가지고 1640~1900년까지의 미국 북동부의 기후와 뉴잉글랜드 지역의 기후를 복원했다.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 3세기 동안 뉴잉글랜드에서는 전반적으로 한랭기후가 나타났으며, 19세기에 10년 주기로 한랭과 온난이 반복되다가 1870년대부터 온난화 경향을 보였다.
Manley(1974)는 영국에서 기기를 이용한 관측시대 초기의 기온 자료를 이용하여 고기후를 복원했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영국에서 1650~1670년에 온난 건조, 1673~1675년에 한랭, 1676~1686년에 더위에 시달렸고, 1680~1690년에 저온현상이 나타났다. 또한 17세기의 영국은 추위와 더위가 교대로 반복되면서 기후변동이 극심했음을 밝힌 바 있다.

사료에 기록된 빙하의 변동을 분석하여 고기후를 복원한 연구가 있다.
Holzhauser and Zumbühl(1999)은 스위스와 프랑스 서부 알프스지방에서 빙하 관련 기록을 통해 빙하의 성장 관련 연구를 수행했다. 1565년 이후 기후변동으로 알파인 빙하(고산빙하)가 급격히 확대되어 17세기에 절정에 달했고, 약 250여 년간 확장된 상태로 남아 있었음을 밝혔다.

Ogilvie(1992)는 아이슬란드에서 1500~1800년간의 해빙(sea ice) 기록을 통해 기후변동을 분석했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16세기 후반과 17세기 초반에 아이슬란드에서 추운 기후가 나타났으나, 17세기 후반에 비교적 온화한 기후가 나타났다. 1690년대에는 갑자기 추운 기후가 많이 출현했고, 18세기 초반에 온화한 기후가 나타났다가 1731년부터 1760년까지 한랭한 기후가 나타났다.

1770년대와 1790년대는 춥지 않았으나 1780년대는 전 시기에 걸쳐 가장 추웠다. 그들의 연구에 의하면 아이슬란드에는 소빙기 기간에도 지속적으로 한랭한 기후만 계속된 것이 아니라 단기간의 온난기와 한랭기가 교대하면서 전반적으로 저온현상이 강화되는 양상을 보였다고 했다.

유럽에서 라인강, 엘베강, 이탈리아 중북부의 강, 카탈로니아와 안달루시아 지방 강들의 범람을 기록한 사료를 통해 이상기후를 분석한 연구가 있다(Brázdil et al., 1999).

이 연구에 따르면, 이들 강의 범람은 16세기 전반기보다 후반기에 심했으며, 이는 16세기 기후변동과 연관성이 있다고 했다.
Kraker(1999)는 1488~1609년에 플랑드르 지방의 폴더 제방에 피해를 입힌 기록을 가지고 이상기후를 분석했다. 16세기 전반기보다 후반기에 그 피해가 컸으며, 폭풍의 경우 약 85%가 1550~1609년 사이에 발생했다. 16세기 전반기에 비해 후반기가 기후변동이 더 심했다.

중국에서 소빙기 기후를 연구한 결과를 살펴보면 유럽과 유사하게 이상기후가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Chang(1976)에 의하면 과거 500년간 중국에 4회의 추웠던 시기와 3회의 온난한 시기가 나타났다. 추웠던 시기는 1470~1520년, 1620~1720년(특히 1650~1700년), 1840~1890년, 1945년 이후(특히 1963년 이후)였다. 온난한 시기는 1550~1600년, 1720~1830년, 1916~1945년이었다.

Wang and Zhao(1981)는 고기록과 현대 관측치를 가지고 1470~1979년에 이르는 중국의 가뭄과 홍수를 분석했다. Wang(1991)은 138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의 고기록과 현대의 기상 관측치를 이용한 북중국의 기온편차를 분석하여 1550년대부터 1690년대까지, 1800년대부터 1860년대까지 두 번의 혹한기가 출현했음을 밝혔다.

일본의 Yamamoto(1970)는 사료를 이용하여 일본의 고기후를 분석한 결과, 소빙기적 기후현상이 일본에서도 전개되었다고 했다. 그 강도는 17세기가 그 이전인 15세기와 16세기, 그 이후인 18세기와 19세기보다 뚜렷했다.

Arakawa(1955)는 1440년부터 일본 중부의 스와(Suwa)호의 매년 결빙 일자를 만들었다. 스와호 지역의 가장 추운 겨울은 1500~1520년, 1700~1710년, 1850~1880년 사이였다.

김연옥(1984a)은 한국의 소빙기 기후 연구를 통해 일본의 소빙기를 국내에 소개하면서 1665~1685년의 연보온난기, 1685~1740년의 원록소빙기, 1740~1780년의 명화소빙기, 1780~1850년의 천보소빙기 등의 4시기로 구분했다.

또한 덕천시대 후기의 3대 기근인 천명기근(1762~1783년), 천보기근(1833~1839년), 경응·명치기근(1866~1869년)은 냉습한 소빙기의 영향 때문이라고 했다.

2) 국내
국내에서 사료를 이용한 고기후 연구는 1980년대 이후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김연옥(1984a)은 『증보문헌비고』 등을 통해 기후요소를 추출하여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의 고기후 복원을 시도했다.

특히 소빙기 연구를 통해 우리나라에서도 유럽 등 전 세계적으로 진행된 소빙기와 유사한 이상저온 현상이 전개되었음을 입증했다.

박근필(1995)은 『조선왕조실록』을 자료로 소빙기의 마지막 시기에 해당하는 19세기 초반을 유럽과 비교하면서 이 기간 동안의 농업 생산 침체를 규명했다. 그는 19세기의 기후변동뿐만 아니라 농업 생산과의 상관관계를 밝혀 고기후학의 연구 범위를 경제 분야까지 확대시키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연구 대상 기간이 1799~1825년으로 짧기 때문에 장기적인 기후변동을 밝히는 데는 미흡했다.

이태진(1996b)은 『조선왕조실록』의 기상현상을 추출하여 분류하고 각 기상현상의 발생 건수를 분석했다. 소빙기적 현상을 분석하는 데 이용한 기상현상은 우박, 서리, 때아닌 눈·비, 혜성·객성 출현 증가 등이다. 이를 바탕으로 1392~1863년의 기간을 50년 단위인 9기로 나누어 기상현상을 분석했다.

김연희(1996)는 한국학데이터베이스연구소(1995)에서 간행한 『조선왕조실록 CD-ROM』을 분석하여 소빙기와 관련된 기후요소와 농업 관련 용어를 검색한 후 이를 계량화했다. 그의 연구는 기온변동 분석과 강우량 분석으로 나눌 수 있다. 기온변동 분석에서는 이상저온 현상과 이상고온 현상을 다루었고, 강우량 분석에서는 비와 홍수, 한해 등을 다루었으며, 이를 통해 한랭기를 도출하고 있다.

그는 소빙기적 기후현상과 농업 생산량의 상관관계를 밝혀 고기후의 연구 영역을 확대시키는 데 기여했다.

『조선왕조실록』은 장기간에 걸친 방대한 편년체 사료로서 대기현상에 관한 기록이 풍부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고기후학적 연구가 많이 이루어졌다.

오종록(1991)의 자연재해 상황, 전영신(2000)의 황사, 소선섭·김용헌(2000)의 기상요소, 김현준(2001)의 홍수와 가뭄, 박정규 외(2001)의 강수, 김재호(2001)의 기근, 임규호·심태현(2002)의 기후변동, 김기원·신만용(2002)의 강설 연구가 이에 해당한다. 우리나라는 세계 최초로 측우기를 발명하여 장기간 강수를 측정했기 때문에 강수 자료가 풍부하여 이에 대한 연구도 행해졌다(조희구·나일성, 1979; 전종갑·문병권, 1997).

국내에서 사료를 통한 이상기후 연구는 『삼국사기』,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증보문헌비고』 및 개인 기록물들을 이용하여 행해졌다. 박성래(1982)는 『삼국사기』,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등을 통해 16세기 이전 한국사에 있어서 가뭄에 대한 기록을 분석했고, 이에 따른 대응책을 규명했다.

박창용·이혜은(2007)은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가뭄과 호우 자료를 이용하여 삼국시대의 이상기후를 밝혔다.

나종일(1982)은 『증보문헌비고』의 기록을 통해 17세기의 농업재해의 주요인은 한해(旱害)였고, 수해, 풍해, 냉해의 피해도 적지 않았다고 분석했다. 또한 이와 연관시켜 농업 생산력의 발전, 인구변동의 추이 등을 설명했다.

이상배(2000)는 전근대사회에서 발생한 자연재해 가운데 백성들에게 직접적이고 광범위한 피해를 주었던 이상기후는 수해와 한해였음을 밝혔다. 그는 수해에 대한 방비책으로 준천(濬川) 공사와 제방공사를 벌여 하천의 범람을 막고, 가뭄에 대한 방비책으로는 제언과 보 등 관개시설을 정비하여 농업용수의 원활한 공급을 도모했다고 설명했다.

조선 후기 강원도 삼척지방에 살던 강릉 김씨 감찰공파 한길댁의 생활일기를 검토·분석하여 18세기 말 정조 때 삼척지방의 이상기후와 그로 인해 발생한 기후재해가 당시의 농업에 미친 영향을 분석한 연구도 있다(배재홍, 2004).

이 연구는 좁은 지역 범위에서 생활일기를 자료로 이상기후와 농업, 재해와 이에 대한 민간의 대응을 상세하게 분석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

최근에 우리나라에서도 역사시대의 문서 기록에 의한 고기후와 기상 관련 자연재해에 관한 연구가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 그러나 사료에 의한 제주도의 이상기후에 관한 연구는 거의 없는 실정이다. 제주도는 이상기후로 인한 재해가 많이 발생했고, 이것이 제주인의 생활과 문화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또한 인명과 재산 및 심리적 피해가 컸던 만큼 과거의 이상기후에 관한 연구가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다.

II. 제주도의 기후 특성

1. 자연 환경
제주도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섬으로 한반도 남서 해상에 위치해 있다.
목포에서 약 145km 떨어져 있고, 부산에서 약 268km 떨어져 있다. 남북 길이는 약 31km이고 동서 길이는 약 73km로 동서로 길쭉한 타원형의 섬이다. 섬 중앙에는 해발 1,950m의 한라산이 있고, 동서로 약 3~5°의 경사를 보이며, 남북으로 약 5° 내외의 경사를 보인다. 한라산을 중심으로 동서사면보다 남북사면이 급한 편이다.
 
한라산을 중심으로 산록에는 ‘오름’이라 불리는 측화산이 360여 개 분포하고 있다. 그래서 용암평원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선의 파노라마를 연출한다.
제주도 지표의 거의 대부분은 현무암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위에 화산회토와 현무암풍화토가 덮여 있으나 토양층은 얇은 편이다.

제주도는 중위도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온대기후가 나타난다. 한반도에 비해 온화한 아열대성 기후를 보인다. 봄이 되면 한랭 건조한 대륙성 고기압이 약해지면서 따뜻해지기 시작한다. 중국 쪽에서 불어오는 이동성 고기압과 저기압의 영향으로 날씨 변화가 심하다. 봄이 끝날 무렵 북태평양 고기압의 영향을 받기 시작한다. 6월쯤 되면 태양의 고도가 높아지면서 강한 일사에 의해 무더워지기 시작한다.

온난 기단과 한랭 기단 사이에 장마전선이 형성되어 6월 말부터 7월 말까지 장마가 영향을 미친다. 장마가 끝나면 본격적인 무더위가 기승을 부린다. 여름부터 초가을까지 태풍이 내습하면서 심한 풍수해를 입기도 한다.
 
가을이 되면 북태평양 고기압이 약해지면서 한여름에 비해 기온이 현저히 낮아진다. 이동성 고기압의 빈번한 이동으로 쾌청한 날씨를 보이고, 11월경에는 시베리아 고기압이 발달하면서 북서계절풍이 불어온다. 겨울에 접어들면 한랭 건조한 시베리아 고기압이 더욱 발달한다. 1월은 대륙 고기압이 더욱 발달하여 북서계절풍이 매우 강하고 기온도 내려가 가장 춥다. 겨울이 끝날 무렵에는 시베리아 고기압이 다소 약해지면서 추위가 누그러진다.

이러한 제주도의 지리적 위치와 기후환경이 사료에도 잘 기록되어 있다. 이형상의 『남환박물』을 보면 “제주도의 넓이는 480리, 동서는 170리, 큰 길로 섬 둘레는 370리”라고 했다. 또한 “제주에서 육지의 해남 관두량까지는 970여 리이고, 동쪽 대마도까지는 2천여 리, 동동남쪽 강호(江戶: 일본 서울)까지는 4천여 리, 옥구도(일본)까지는 3천여 리, 남남동쪽의 일기도(일본)까지는 3천 5백여 리, 남쪽 여인국(女人國)까지는 8천여 리, 남쪽 유구국[오키나와]까지는 5천여 리, 남남서쪽 안남국[베트남]까지는 1만 7천여 리, 남남서쪽 섬라국[타이] 및 점성[참파]은 1만여 리, 서남쪽 영파부(중국)는 8천여 리, 서서남쪽 소주와 항주는 7천여 리, 서서서남쪽 양주는 7천 리, 서쪽 산동성은 1만여 리, 서서북쪽 청주는 1만여 리”라고 기술되어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 제주인들은 해양지리적 위치에 관심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제주인들은 주변국과의 바닷길 등 지리적 관계를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시대 제주도는 행정구역상 전라도에 속해 있었다. 제주도 내의 행정구역은 제주목, 대정현, 정의현의 삼읍체제로 구성되어 있었다. 제주목은 섬 북쪽에 있고, 대정현은 한라산 서남쪽에, 정의현은 한라산 동남쪽에 위치해 있었다.
 
『제주읍지』를 보면 제주도 삼읍 간 노정이 기록되어 있다. “제주목 성문에서 해안가 큰길을 따라 동쪽으로 정의현 경계인 하도리까지 80리, 서쪽으로 대정현 경계인 두모리까지 90리이다. 정의현 성문에서 큰길을 따라 동쪽으로 제주목 경계인 종달리까지 35리, 서쪽으로 큰길을 따라 대정현 경계인 법환리까지 95리, 소로를 따라 북쪽의 제주목 경계인 활미마을(궁산리)까지 10리이다.

소로를 따라 남쪽의 바닷가인 세화리까지 20리이다. 대정현 성문에서 동쪽의 정의현 경계까지는 큰 길의 경우 병참(竝站)에 이르기까지 57리이다. 서쪽의 제주목 경계까지는 큰 길의 경우 두모리에 이르기까지 35리이다.”라고 하여 삼읍의 거리와 경계를 밝히고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 삼읍의 경계와 범위는 시기별 행정구역의 개편에 따라 다소 달라진다.

임제는 『남명소승』에서 “제주도는 중국과 일본의 중간에 위치해 있다. 일본인들이 중국에 갈 때는 제주도와 추자 사이를 경유하기 때문에 섬의 동쪽과 서쪽이 군사 전략상 요충지가 되고 있으며 한라산 남쪽은 북쪽에 비해 방호의 긴요함이 덜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제주해협은 중국과 제주도, 일본을 연결하는 중요한 동서 해상교통로였음을 알 수 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는 다른 고지도에 비해 제주도가 비교적 정확히 그려져 있다. 제주목, 정의현, 대정현의 읍성 위치와 경계, 한라산과 오름들, 산줄기와 하천, 봉수, 연대, 도로, 국영목장, 관과원 등이 표시되어 있다. 특히 한라산을 중심으로 동서로 길게 한라산 주능선이 그려져 있고, 도로는 10리마다 방점을 찍어 거리를 쉽게 알 수 있도록 했다.

제주도를 상징하는 한라산(漢拏山)은 운한[雲漢: 은하]을 나인[拏引: 끌어당김]할 만한 높은 산이라는 데서 비롯되었다. 한라산은 예로부터 금강산, 지리산과 더불어 삼신산의 하나이다. 다른 이름으로는 두무악(頭無岳)·영주산(瀛洲山)·부라산(浮羅山)·부악(釜岳)·원산(圓山)·진산(鎭山)·선산(仙山)·혈망봉(穴望峰)·여장군(女將軍) 등 많은 이름으로 불렀다.

두무악은 ‘머리가 없는 산’임을 의미한다. 한라산 정상에 백록담 화구호가 있어 움푹 들어가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한라산 산록의 수많은 오름들도 스트롬볼리식 분화로 화산체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움푹 들어간 분화구가 발달해 있다. 육지의 산지들은 침식 과정에서 형성되었기 때문에 산이 가파르고 정상부가 뾰족한 데 비해 한라산과 많은 오름들은 정상부가 움푹 들어가 있으니 육지 사람들에게는 머리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김정은 『제주풍토록』에서 제주도의 지형을 잘 표현하고 있다. 그는 “제주목과 정의현과 대정현은 모두 한라산 산록 끝에 있다. 한라산은 높고 험하며 제주도의 땅들은 자갈이 많아서 평토가 절반도 안 된다. 밭 가는 자는 고기의 배를 도려내는 것 같고, 제주도의 지세는 땅이 평탄하고 넓은 것 같으나 기복이 심하다. 낮은 언덕들이 많이 있지만 난총(亂塚)과 비슷하다. 돌들이 지천으로 쌓여 있고, 완강한 쇳돌[현무암]은 검고 거칠어서 보기에도 눈에 거슬린다. 오름들은 여기저기 있으나 독립적으로 떨어져서 우뚝 솟아 있다. 하나같이 머리가 없으며, 분지처럼 산으로 둘러싼 형세도 없다. 한라산이 하늘 가운데 우뚝 솟아 있다.”고 표현하였다.

2. 주요 기후요소 특성

제주도의 풍토와 기후에 관한 초기 기록물로 김정의 『제주풍토록』을 들 수 있다. 그의 기록은 김상헌의 『남사록』, 이원진의 『탐라지』, 김성구의 『남천록』 등 후대의 기록에서 제주도를 기술할 때 많이 인용되었다. 김정은 제주도의 기후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제주의 기후는 겨울이 혹 따뜻하고, 여름이 혹 서늘하나 일기변화가 심하다.
바람과 공기는 따뜻한 것 같으나 사람에게는 몸서리 날 만큼 날카롭고 사람의 의식에 알맞게 조절하기 어려워 병이 나기 쉽다. 게다가 운무가 항상 음침하게 가리고, 하늘이 맑게 갠 날이 적으므로 거기에 대하여 세찬 바람과 폭우가내릴 때가 많다. 찌는 듯이 덥고 축축하므로 숨이 막힐 듯이 답답하다.1)

김정은 제주도의 기후가 겨울에 춥지만 때로는 따뜻하고, 여름에 덥지만 때로는 서늘하다고 했다. 한반도는 겨울에 춥고 여름에 더운 한서의 차가 큰 대륙성 기후이다. 반면에 제주도는 한서의 차가 육지에 비해 적은 해양성 기후를 보인다.

이러한 기후특성을 보여 주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날씨 변화가 심하다고 했다. 대양 상에 있는데다 섬 중앙에 한라산이 위치해 있어 날씨가 자주 변한다. 강한 바람과 예측하기 힘든 폭우, 고온다습한 날씨 때문에 생활하기에 불편함을 토로하고 있다. 타지의 사람들은 변화무쌍한 제주도의 기후에 의식(衣食)을 조절하기 힘들어 병에 걸리기 쉽다고 하고 있다.

제주도의 기후가 한반도에서 따뜻하다는 남해안 지역과도 다름을 중종 때 제주목사의 치계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감귤은 연해의 각 고을에 옮겨 심어 보았으나 끝내 열매가 맺지 않았으니, 아울러 정파하소서.”2)

감귤은 제주도의 특산물로 유명했고, 조선시대에 진상품으로 귀하게 취급 되었다. 제주인들에게 감귤은 수탈의 도구였기 때문에 재배를 기피했다. 정부는 감귤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남해안의 여러 고을에 시험적으로 옮겨 심었으나 결국은 열매를 맺지 못했다. 난대성 작물인 귤나무는 제주도 기후환경에서 정상적으로 생육했지만, 남해안에서는 실패했다. “강남의 귤이 회수(淮水)를 넘어 강북으로 가면 탱자가 된다.”는 말도 있듯이 제주도 감귤을 남해안에 심었더니 열매를 맺지 못했던 것이다. 이는 제주도와 남해안 지역의 기후가 다르기 때문이다. 조선시대는 기후사적으로 소빙기에 해당하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한랭했다. 이런 기후환경에서 난대성 작물인 감귤을 남해안 지역으로 옮겨 심으니 생육이 더욱 불량했다. 감귤을 남해안에 옮겨 심는 제주인들의 고충이 심했기 때문에 제주목사는 이를 폐지해 달라고 청하고 있다.
1) 기온
조선시대 제주도의 기온특성은 여러 사료에 잘 나타나 있다. 당시 기온을 측정할 수 있는 관측기기가 없어서 대기의 상태를 정확히 표현하지 못했지만 제주도의 체감 기온상황은 여러 사료에 잘 나타나 있다. 그중 이건의 『제주풍토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제주도는 장기(瘴氣)로 찌는 듯이 덥고 가슴이 답답하다. 토지는 습열하기 때문에 겨울에 차갑지 않고 내와 못도 얼지 않아 얼음을 저장할 수 없다. 순무, 영초, 파와 마늘 등은 한겨울에도 밭에 둔 채로 아침, 저녁에 캐어다가 쓰고 있다.3)

장기는 습하고 더운 땅에서 생기는 독한 기운이다. 제주도는 한반도에 비해 고온다습한 지역이기 때문에 육지에서 파견된 관리와 유배인은 기후에 적응하기 힘들었음을 알 수 있다. 한양 일대는 겨울이 되면 땅이 얼고 하천도 결빙된다.

그러나 제주도는 하천이 얼지 않기 때문에 얼음을 구하기 힘들고, 한겨울에도 밭에서 채소가 자랐다. 육지에서 내려온 사람들은 이러한 제주도의 겨울 경관을 체험하면서 따뜻한 지역이라는 인식을 많이 했다. 김상헌은 『남사록』에서 제주도의 기후특성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나무들은 겨울에도 푸른 것이 많다. 냉이와 같은 것들이 꽃 피었다 시들었다하는 것이 철을 가리지 않는다. 마당에 눈이 가득 쌓였는데 나비가 날아오고 마당의 풀은 항상 푸르다. 서울의 3, 4월과 다를 것이 없다. 제주인들 가운데 매우 가난한 자가 한 겹의 옷으로 몸을 가리거나 망석(網席)을 뚫어서 입고 뛰어다니며 일을 하여도 얼어 죽지 않는다.4)

김상헌은 제주도의 한겨울 날씨가 서울의 3, 4월 날씨와 흡사하다고 했다.
한겨울에 한 겹으로 된 옷을 입어도 동사자가 없고, 겨울철에도 꽃과 나비를 볼 수 있을 정도로 제주도의 기후가 온화함을 표현하고 있다.

이형상은 『남환박물』에서 제주도 기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뱀·살무사·땅강아지·나비·하루살이·거미 같은 생물들이 겨울과 여름 내내 있다.5)

뱀이나 나비, 하루살이와 같은 생물들은 한반도 대부분 지역에서는 겨울철에 활동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생물들이 제주도에서는 겨울에도 활동하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했다. 이와 같이 육지에서 내려온 관리나 유배인은 제주도의 온화한 기후를 인상 깊게 인식하고 있었다. 한양에서는 겨울철에 채소와 작물을 보기 힘들다. 그런데 제주도에 와 보니 한겨울에도 채소가 자라고 곤충들도 돌아다니고 있어 신기하게 보였을 것이다. 제주도의 겨울철 기후는 육지에 비해 온화하여 지내기가 수월했다. 이 때문에 우리나라의 난방문화를 대표하는 온돌이 발달하지 않았음을 김정의 『제주풍토록』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품관인(品官人) 외에는 온돌이 없다. 땅을 파서 구덩이를 만들어 돌을 메워 그위에 흙으로 발라서 온돌 모양같이 한다. 말린 뒤에 그 위에서 잠을 잔다.6)
제주인들은 방바닥을 파서 돌로 메운 다음 흙을 발라서 건조시킨 후 그 위에서 잠을 잤다. 제주도는 온화한 기후로 온돌의 필요성이 적었다. 방바닥에서 올라오는 습기는 돌로 메워 막고 있다. 부엌에는 돌로 아궁이를 만든 다음 솥을 얹혀 놓고 취사했다. 아궁이의 방향도 내부의 방을 향해 배치하지 않고 외벽을 향하게 했다. 통풍구를 설치하여 취사열이 실외로 쉽게 빠져나가도록 했다. 안방을 향해 아궁이를 만들면 가옥 내부가 뜨거워져 생활하는 데 불편했기 때문이다. 육지는 취사열을 난방열로 이용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제주도는 취사하는 데만 사용했다.

조선시대 기록에는 제주도 내의 지역 간 기온 차이도 언급하고 있다. 이원진은 『탐라지』에서 “제주목은 한라산 북쪽에 위치하여 남쪽에서 불어오는 습한 바람을 한라산이 막아 주고, 북서풍이 습한 열기를 흩어지게 함으로써 더위가 덜하기 때문에 한라산 북쪽이 남쪽보다 장수자가 많다.”7)고 했다. 한라산 남쪽은 습하고 더운 데 반해 북쪽은 이러한 장기(瘴氣)가 덜해서 사람들이 오래 산다고 했다.

이형상의 『탐라순력도』를 보면, 노인 인구수가 기록되어 있다. 이형상은 제주목사로 부임 후 1702년 10월 29일부터 11월 12일까지 제주도를 순력했다.

 이때 제주, 정의, 대정에서 80세 이상 노인들을 모아 양로연을 베풀었는데, 이에 참석한 노인의 숫자는 <표 2-1>과 같다.
80세 이상 노인 숫자를 보면 제주목은 209명, 정의현은 22명, 대정현은 12명이다.
노인 인구수의 비율을 보면 제주목이 86%로 정의현과 대정현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다.

<표 2-2>의 조선시대 제주도 내 지역별 인구 비율을 고려하더라도 제주목은 장수자 비율이 높음을 알 수 있다.

이원진의 주장처럼 이형상의 노인인구 자료를 통해서 볼 때, 산북이 산남에 비해 장수 인구가 더 많음을 알 수 있다.
제주도는 섬 중앙에 한라산이 위치해 있기 때문에 사면과 해발고도에 따른 기온 차가 심하다.

성종 때 제주도에 왔던 관리가 조정에 보고한 내용을 보면, 제주도의 기후는 한라산의 사면에 따라 지역 차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신이 일찍이 사명을 받들고 제주에 가서 보니, 산 북쪽은 바람 기운이 춥고 강하여 초목이 쉽게 말라 죽고, 산 남쪽은 겨울에도 눈과 서리가 없어서 나뭇잎이 마르지 아니하며 말을 기르면 매우 살이 찝니다.8)

한라산의 북쪽은 찬바람의 기운이 강해서 초목이 냉해로 쉽게 말라 죽어 버리고, 남쪽은 겨울에도 눈과 서리가 적어 나뭇잎이 말라 죽지 않는다. 한라산 남쪽에 말을 기르면 잘 자라고 살찌기 때문에 목장 운영은 한라산 북쪽보다 유리하다고 했다.

제주도의 온화한 기온특성과 지역 간의 기온차는 오늘날 기상 자료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1981~2010년간의 평년값을 보면, 제주는 연평균기온 15.8℃이고 1월 평균기온 5.7℃이다. 서울은 연평균기온 12.5℃이고, 1월 평균기온 -2.4℃로 제주보다 낮다. 여름철 기온은 제주와 서울 간 큰 차이가 없지만, 1월 평균기온 차는 8.1℃로서 겨울철에 매우 크다. 그 이유는 제주도가 서울보다 남쪽에 있어 그만큼 대륙 고기압의 영향을 적게 받기 때문이다.

제주도 내에서도 한라산 사면에 따라 기온이 다르다. 연평균기온을 보면 제주시는 15.8℃이고, 서귀포는 16.6℃로 한라산 남사면이 북사면보다 기온이 높다. 한라산 북사면은 겨울바람이 강하여 더욱 춥게 느꼈을 것이다. 육지에 비해 따뜻한 기온특성, 제주도 내에서의 지역 간 기온 차 등은 육지에서 내려온 관리나 유배인들이 잘 인식하고 있었다.

김상헌은 『남사록』에서 1601년 10월 20일(양력) 한라산을 등반하면서 고도에 따른 기후특성을 관찰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제주도는 매우 따뜻한 곳인데 내가 9월에 올라서 보니 산 아래 초목들은 모두 초가을 풍경이다. 산 위는 아침 서리가 눈 같고, 산꼭대기 못의 물은 얼기 시작했다. 이상하여 지방사람에게 물으니 일찍 추위가 오는 해는 8월에 눈이 내리고, 겨울철이 되면 눈이 안 오는 날이 없기 때문에 그늘진 골짜기의 가장 깊은곳은 5월에도 잔설이 남는다고 했다. 또한 섬 안에는 옛날부터 얼음을 저장하는 곳이 없으며 관가에서 여름철이 되면 항상 산 속에서 가져다 쓴다.9)

10월(양력)의 해안지역은 가을 날씨인데 한라산 고지대는 초겨울 날씨를 보이고 있다. 해발고도에 따른 기온차가 심한 제주도의 기후특성을 잘 표현하고 있다. 환경기온감률 때문에 해안 저지대에서 한라산 정상으로 갈수록 기온이 떨어진다. 지역과 대기환경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100m 올라갈 때마다 약 0.6℃씩 낮아진다.

김상헌은 해발고도가 높아질수록 추위가 더 심함을 인식하고 있다. 여름에는 한라산 깊은 골짜기의 얼음을 캐다가 관용으로 사용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오늘날 한라산은 깊은 계곡이라 할지라도 한여름에 잔설과 얼음을 보기 힘들다. 그 당시 제주도는 지금보다 저온현상이 전개되었기 때문에 결빙 기간도 길었음을 보여 준다.

2) 바람
제주도는 대양 상의 섬이며, 저위도와 고위도 간 열교환 통로인 중위도에 위치하기 때문에 바람이 많고 강하게 분다. 제주도의 바람은 주민 생활에 많은 영향을 주었고, 특히 태풍과 겨울 계절풍의 영향이 컸다. 임제는 『남명소승』에서 제주도의 바람특성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한라산 북쪽에는 항상 북풍이 많다. 팔방위의 바람 중에서 북쪽이 가장 세찬까닭에 제주 경내의 나무는 모두 남쪽을 가리키고 있으며 닳아진 비와 같다.
바람이 일 때면 해수입자가 비 오듯 하여, 바다 가까운 10리 사이에 초목은 모두 짠 기운에 젖는다. 정의·대정 두 현의 지경에는 예로부터 북풍이 없다. 산북은 비록 하늘이 무너지고 바다가 뒤집힌다 하더라도, 산 남쪽은 가는 풀도 움직거리지 않는 까닭에 땅이 한층 따뜻하고 장기(瘴氣)가 심하다. 10)

한라산 북사면인 제주목은 북서계절풍의 바람받이 사면이기 때문에 바람이 강하지만, 한라산 남사면은 지형효과로 바람이 약하다. 한라산 북쪽은 하늘이 뒤집힐 듯 폭풍이 강하게 불어도 남쪽은 가는 풀조차 미동도 하지 않을정도로 바람이 약하다고 했다. 강풍이 불 때는 해수 입자가 육상으로 날려 농작물과 식물에 조풍해를 입히고 있다.

바람이 강한 지역에서는 편향수를 흔히 볼 수 있다. 편향수는 바람에 의해서 한쪽으로 심하게 기울어진 나무이다. 관측시설이 없는 곳에서는 바람의 강도와 탁월풍을 추정할 수 있는 좋은 지표이다. 임제는 편향수를 ‘닳아진 비[禿帚]’라고 표현하고 있다. 한라산 북사면 해안지역에 있는 나무들은 모두 남쪽을 향해 있다고 했는데, 이것은 북풍이 강한 지역임을 의미한다.

<사진 2-1>을 보면 팽나무가 바람과 해수 등에 의해 심하게 편향되어 있다. 바람이 세차게 부는 지역임을 알 수 있다.

김상헌은 『남사록』에서 “운반할 때 등에 지며 머리에는 이지 않는다. 물을 길어 오거나 곡식을 베는 것 같은 일은 여인들이 한다.”11)고 했다. 제주도는 바람이 강하기 때문에 육지처럼 머리에 이고 다닐 수가 없다. 여자들이 식수나 짐을 운반할 때 항상 등에 지고 다녔다.

『신증동국여지승람』, 『탐라지』 등에는 강풍에 의한 사빈과 사구의 발달과정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원진의 『탐라지』에 보면, 제주시 구좌읍 김녕-월정-행원-하도 지경에 있는 사빈과 해안사구가 잘 표현되어 있다.

장사(長沙)는 제주의 동쪽 56리쯤에 있고 길이가 15리쯤 된다. 바다의 물결에 의하여 쌓인 모래가 조수는 줄고 뜨거운 일광에 말라서 바람을 타고 날려 가까운데서 멀리까지 이른다. 낮은 것이 높아져 쌓임이 점점 커지면 초목을 매몰하고 언덕을 이루어 산을 만든다. 만약 전답이 있는 곳이라면 그 밭의 소재를 잃어버린다. 별방 부근에도 모래가 언덕을 이룬 곳이 있다.12)

장사는 구좌읍 지역에 발달한 사빈과 사구를 말하고 있다. 김녕, 월정, 행원, 세화, 하도까지 포켓 비치(pocket beach)형으로 사빈이 발달해 있다. 오늘날 이 지역의 사빈과 사구는 경관이 뛰어나 해수욕장과 관광지로 이용되고 있지만, 과거에는 강한 바람에 모래가 날려 농경과 생활에 불리했다. 주민들은 경지와 가옥을 보호하기 위해 방사림을 식재하고 방사제를 시설하기도 했다.

조선시대의 바람특성은 오늘날의 자료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겨울철 월평균 풍속은 제주가 4.3m/s, 고산은 9.5m/s이지만 서귀포는 3.5m/s에 불과하다. 또한 겨울철 평균 폭풍일수를 보면 제주는 4.6일, 고산은 44일이지만, 서귀포는 0.2일에 불과하다. 이를 통해 한라산 북사면과 서사면 지역이 남사면 지역보다 바람이 강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고산은 겨울철에 이틀에 한 번꼴로 강풍이 불고 있다. 서울은 연평균 풍속이 2.3m/s이고 1년 폭풍일수는 0~1일에 불과하다.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나 유배인들은 제주도가 바람이 강한 지역임을 체감했을 것이다.

제주도에서 가장 강력한 바람은 태풍(颱風)이다. 바람의 강도가 약한 육지에서 온 사람들에게 태풍은 공포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효종 3년 9월 23일 기사를 보면 “제주, 정의, 대정에 구풍(颶風)이 크게 불고 폭우가 사납게 내려서 말이 많이 죽고 백성들도 빠져 죽은 자가 있었다.”13)는 내용이 있다. 여기서 구풍은 열대성 저기압, 즉 태풍을 의미한다. 오늘날의 태풍은 북태평양 저위도 해상에서 발생한 열대성 저기압으로 중심에서 최대풍속이 초속 17m 이상인 것을 말한다.

조선시대의 태풍은 구(颶), 구풍(颶風), 대풍(大風), 풍재(風災)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14) 태풍은 강한 바람과 많은 폭우로 육지의 동·식물뿐만 아니라 바다에서 항해하는 선박에게도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다.

오늘날의 자료를 보면, 북서태평양 저위도 해상에서 1951~2014년 사이에 발생했던 태풍은 연평균 26.1개이다. 그중 우리나라에 영향을 준 태풍은 3.2개이다. 제주도는 우리나라를 통과하는 태풍의 길목에 위치해 있어 그 피해가 심했다. 태풍은 워낙 세력이 강하기 때문에 내습하면 제주도 전역은 극심한 풍수해를 입었던 것이다.

태풍보다 강하지는 않지만 독한 바람이 있다. 가을부터 봄까지 지속적으로 부는 북서계절풍이다. 태풍은 여름철에 일시적으로 짧은 기간에 영향을 미쳤지만, 북서계절풍은 가을과 겨울, 그리고 봄까지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영향을 주었다.

특히 겨울철의 북서계절풍은 강한데다 매섭기까지 하여 제주인들을 많이 괴롭혔다.

제주도는 유라시아 대륙과 태평양 사이에 있기 때문에 대륙과 해양 간의 비열 차에 의하여 계절풍이 분다. 겨울철에는 시베리아 고기압이 발달하고, 이에 따라 북서풍이 많이 분다. 여름철에는 북태평양 고기압이 발달하고, 이에 따라 남서, 남동풍이 많이 분다. 겨울에 바람이 강한 것은 대륙과 해양 간의 온도 차이가 여름보다 더 크기 때문이다. 겨울에는 대륙과 해양 간 기압경도력이 커서 공기의 이동 속도가 빨라지는 것이다.

제주도는 대양 상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바람이 해양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가속되어 더욱 강해진다. 제주도의 편향수와 사구의 발달, 가옥구조 및 주민생활 등에 북서계절풍이 많은 영향을 끼쳤다.

3) 강수
김상헌의 『남사록』을 보면 제주도 강수의 특성이 잘 나타나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매년 춘하에는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고 비가 많으며 맑은 날이 적다. 산 남쪽이 더욱 심하다. 추동에는 하늘이 개지만 폭풍이 많고 눈이 많이 쌓인다. 산북이 더욱 심하다.15)

김상헌은 비와 구름, 안개는 여름에 많고 겨울에 적다고 하며 강수의 계절차를 표현하고 있다. 또한 한라산 남쪽은 여름에 강수가 많고, 한라산 북쪽은 겨울에 눈이 많다고 하여 강수의 지역 차도 잘 인식하고 있다. 이러한 강수특성은 오늘날의 자료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연평균 강수량은 제주가 1,499mm이고, 서귀포는 1,924mm로 서귀포가 많다. 제주도의 강수는 여름에 많고 겨울에 적다. 가을과 겨울에는 제주가, 여름과 봄에는 서귀포가 강수량이 많다. 비가 오려면 공기가 상승하면서 수증기의 응결과정을 거쳐야 한다. 한라산은 풍향에 따라 공기를 강제 상승시키는 지리적 인자로 중요하다. 겨울철에는 북서기류가 발달하는 계절이다. 바람받이 사면인 북사면에서 공기가 상승하면서 비와 눈이 많이 내린다.

여름철에는 남서, 남동 기류가 발달하면서 바람받이 사면인 남사면에서 공기의 상승으로 비가 많이 내린다. 그 결과 나타나는 강수의 지역 차를 김상헌은 잘 인식하고 있다.
 
제주도의 강수현상에서 특징적인 것은 지역 차가 크다는 것이다. 고산지역의 연평균 강수량은 1,143mm로 서귀포 강수량의 절반 정도에 불과하다. 제주도가 우리나라의 최다우지역이라는 것을 무색하게 하는 강수량이다. 고산지역은 한라산과 멀리 떨어져 있어 지형효과가 미미하다. 높은 산이 거의 없는 평야에 가까운 지역이라 공기를 상승시킬 만한 지형이 없다. 조선시대 가뭄 통계를 보면 삼읍 중 고산이 속해 있는 대정현에서 가뭄 피해가 가장 많다.
 
이원진은 『탐라지』에서 제주도의 하천을 “가물면 말라 버리고 비가 오면 물이 불어 넘친다.”16)고 했다. 평시는 건천을 이루다가 폭우 시에는 물이 불어나는 유수 현상을 표현한 것이다. 제주도는 다공질 현무암이 발달하여 빗물이 쉽게 지하로 스며든다. 투수율을 초과하는 폭우가 발생하면 유수의 증가로 하천에 물이 흐르고, 폭우 시는 범람하여 수해를 입히기도 한다.

제주도는 다우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지질구조상 배수가 왕성하기 때문에 지표수 결핍지역으로 식수를 구하기가 어려웠다. 용천수가 취락 인근에 있으면 물을 얻는 데 유리했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먼 곳까지 가서 물을 길어 왔다.

특히 중산간 마을은 물이 귀했다. 샘이 없는 마을은 비가 오면 고이는 물을 식수로 사용했다. 가뭄으로 말라 버리면 주변 건천의 소(沼)에 고여 있는 물을 떠다 먹기도 했다. 물을 운반할 때는 ‘물구덕’에 ‘물허벅’을 넣어 지고 다녔는데, 주로 여자가 담당했다.

비가 올 때 집 울타리 안에 있는 감나무나 팽나무 같은 거목에 ‘촘새’를 매달아 물을 얻기도 했다. ‘촘새’라 불리는 띠로 댕기처럼 엮은 ‘촘새’를 나무와 항아리[촘새]에 연결하여 빗물을 받아 생활용수로 사용했다. 이 물을 ‘촘물’이라 했는데, 자연과 더불어 사는 제주인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촘물’ 취수는 해안가 마을보다 중산간 마을에서 많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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