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말기 1943년 가장 많은 358명 동원...전년대비 두 배 이상 증가한 수치
조선인 전체 해군 군속 동원 일본 63.4%, 한반도 10.1%, 태평양 30%, 동남아시아 3.2% 투입
일본 지역 투입 제주인 현주소 日 오사카 지역 인원 다수 확인...이들 일본 도일 후 강제동원 추정

나가사키 원폭박물관에 나가사키 원폭투하로 외국인 피폭자수. 조선인 1만3천~1만4천명, 중국인 650명 등의 피해내역이 기록된 모습. 사진은 기사와 관련없음.

제주인 해군군속의 사망현황은 국가기록원에서 제공한 1천453건 중 선원을 제외한 806명 중 본적지가 기재되어 있지 않은 11명을 제외한 제주인 해군군속의 출신지역별 분포는 제주읍에서 가장 많은 177명 22%가 동원되어 사망했다.

이어 한림면 135명 17%, 애월면 82명 11%, 구좌면 78명 10%, 서귀면 72명 9% 등에서 동원되어 사망했다.

동원 시기는 진주만 기습(1941년 12월 7일)으로 미국과의 전쟁이 시작되기 이전인 1940년 4월과 1941년 11월에도 동원하는 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

이는 미국과의 전쟁을 대비해 주로 ‘남양군도’와 같은 전략 요충지에 군사시설 구축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후 1942년에는 137명으로 전년 대비 10배 이상으로 증가하며, 8월에 가장 많은 67명이 동원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태평양 전쟁말기인 1943년에는 가장 많은 358명이 동원되는데, 전년에 비해 두 배 이상 증가한 수치이다.

이해 12월에 나타나는 126명의 동원 수는 월별 동원 수 중에서 가장 높은 수치를 보인다. 1944년에는 40% 정도가 감소한 221명이 동원됐고, 1945년에는 12명으로 급격하게 감소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런 양상은 전체 조선인 해군군속 동원 시기별 분포와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물론 진주만 기습 이전부터 동원이 진행되고, 1942년부터 본격적인 동원이 진행되는 것은 제주인의 동원 양상과 유사하다.

제주인을 포함한 조선인 군속 동원의 특징 중의 하나가 바로 ‘지역집단동원’이다. 즉 특정한 일시에 주로 郡을 단위로 하는 특정 지역에서 다수의 인원을 동원해 이들을 한 부대·부서에 투입하는 형태이다.

제주인 해군군속 동원에도 이런 양상이 나타난다. 와카야마현(和歌山縣)의 와카야마 지역으로 투입된 오사카 해군시설부 와카야마지방시설부 소속의 제주인 19명 중 17명이 동일한 날짜(1944년 6월19일)에 동원된 사례와 히로시마현(廣島縣) 구레(吳)지역의 구레해군공창에 94명이 투입되고, 이들 중 42명이 1944년 4월 25일에 26명이 같은 해 3월 2일이라는 동일한 날짜에 투입되는 양상을 보여준다.

이런 ‘지역집단동원’의 양상을 통해 볼 때, 1명 내지는 소수의 인원만이 기재된 명부자료들의 경우 다수의 인원이 동원되었음에도 관련 기록이 누락된 것으로, 실제로는 더 많은 인원이 동원되었을 것이라는 추정도 가능케 한다.

제주인 해군군속들 806명 중 일본 지역으로 투입된 인원은 404명, 그 외의 지역으로 투입된 인원은 402명으로 유사한 비율을 보인다.

일본 지역에 집중되는 것은 조선인 전체 해군 군속 동원 양상에서도 확인된다. 전체의 경우도 일본 지역에 가장 많은 63.4%가 투입되었으며, 한반도 지역 10.1%, 태평양 지역 30%, 동남아시아 지역 3.2%가 투입되었다. 일본 지역과 그 외 지역으로의 투입 비율이 전체에 비해 약하지만 유사한 양상을 보인다고 할 것이다.

서부 태평양 지역의 경우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이 위임통치하는 구독일령 ‘남양군도(南洋群島)’를 중심으로 진주만 기습 이후 침략·점령한 인근의 비스마르크 제도, 얍, 길버트 제도 및 뉴기니아 지역으로 투입되는 것이 확인된다.

여기서 주목되는 부분은 마샬 제도의 작은섬 웻체(Wetje)로 투입된 59명의 경우이다. 도라쿠(현 Chuuk)에 투입된 60명 다음으로 많은 인원이 투입되는데, 그 중요성에 비해 특징적이라 할 수 있다.

이 웻체에 투입된 전체 조선인 해군군속의 규모는 총 225명으로 59명의 제주인이 약 27%를 차지한다.

반면에 서부 태평양 지역에서 가장 많은 조선인 해군군속이 투입된 도라쿠의 경우 총 5천827명이 투입됐고 여기서 제주인 60명이 차지하는 비중은 약 1%를 겨우 상회하는 수준이다.

웻체에 다수의 제주인들이 집중되는 양상은 서부 태평양 지역으로의 제주인 투입의 특징적인 모습이라 할 것이다.

일본 지역으로 투입된 제주인들의 현황을 보다 먼저 진수부와 같은 주요한 해군 기관이 존재하는 지역으로 다수의 인원이 투입되는 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

가장 많은 152명의 인원이 투입되는 히로시마의 경우, 주로 구레에 집중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히로, 요시우라, 야노우라 등의 도시들은 구레 인근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사실상 구레 지역으로 투입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세 번째로 많은 41명이 교토부 마이즈루에, 네 번째로 많은 22명이 가나가와현 요코스카에 투입됐다.
 
이들 지역은 도쿠시마를 제외하고, 일본 해군의 주요 기관이었던 진수부가 위치하고 있는 지역이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진수부는 군사 행정의 실시 기관이자 동시에 작전을 담당하는 작전 부대였다.

해상·육상에 완비된 군사시설을 보유하고 정해진 海軍區 내의 방어와 경비를 담당하며, 동시에 작전부대의 중요한 후방 ‘策源地’로써 ‘出師準備’에 관한 것을 관장했다.

각 군항에 설치된 진수부는 1876년 도카이(東海)진수부(1884 요코스카(橫須賀)진수부로 개칭)를 시작으로 쿠레(吳)·사세보(佐世保)·마이즈루(舞鶴)진수부 등이 설립됐다.

한편 각 요항에 설치된 경비부는 진수부의 조직과 임무를 소형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1896년 다케시키(竹敷)要港部를 시작으로 오미나토(大湊)·鎭海·馬公·旅順·[오사카(大阪)·高雄]경비부 등이 설립됐고, 1941년 경비부로 개칭됐다. 이들 진수부·경비부는 소재지명을 기관명으로 사용하여 요코스카진수부 및 오미나토경비부 등으로 불렸다.

이들이 투입된 요코스카해군시설부·해군공창, 구레해군시설부·해군공창, 마이즈루해군 시설부들은 바로 이러한 진수부 편제 내에 존재하는 부서들이다.

제주인 해군군속들이 투입되는 대부분의 부대·부서들 역시 바로 이러한 진수부 편제와 밀접한 연관을 지니는 것들이다.

이들 지역에 다수의 인원이 투입되는 것은 전체 조선인 해군군속의 경우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난다. 가장 많은 인원 8천913명이 요코스카에, 두 번째로 구레 5천112명, 세 번째로 마이즈루  4천782명 등이 투입됐다.

이들이 투입된 부서들은 주로 해군시설부와 해군공창으로 확인된다. 해군시설부의 경우 ‘해당 지역의 축성 시설 및 일반 시설에 관한 토목·건축’을 업무로 했다.

여기에 투입된 제주인들 역시 신분이 대부분 공원이나 토공원으로 나타나는 점에서 주로 군사시설 구축과 건설공사에 투입된 것으로 판단된다. 해군공창으로 투입된 인원들의 경우 역시, 공원과 토공원이 주를 이루는 그들의 신분으로 볼 때, 병기 등의 제작이 아닌 해당 공창 내의 건설 공사에 투입된 것으로 판단된다.

일본 지역에 투입된 제주인들의 경우에서 현주소가 일본 지역, 특히 오사카 지역으로 되어 있는 인원들이 다수 확인되는데, 이들의 경우 일본으로 도일한 이후에 강제동원된 것으로 추정된다.

제 4연료창의 경우 1명의 제주인 투입이 확인되는데, 제 4연료창에 투입된 조선인들의 기록에는 본적지 주소가 기재되지 않은 인원이 다수를 차지한다. 이에 따라 ‘지역집단동원’의 측면에서 볼 때, 1명 보다는 많은 수의 제주인들이 투입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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