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 향토연구자 강제연행 자료(명부) 제주도 출신(11명 추정)의 명단 일부 확인...연구자 공개를 꺼려 사망자 명단 확보 아쉽게 실패

강제연행되어 억울하게 죽은 이름도, 고향도 모르채 죽은 조선인 무명인 유골함들 모습.

‘일제 강제연행 제일 제주인 이주경로 추적’보고서에 따르면 1939년 기준 재일본 제주인은 4만천5900여 명에서 1945년 해방 당시 10만여 명 큰 폭으로 증가했다고 밝혔다.

이는 이 시기 일본의 제주도민에 대한 강제징병 및 징용에 따른 결과라는 학자들의 공통적인 연구결과라는 것.

보고서에서 이들은 1930년대 후반에 이르러 전쟁 수행을 목적으로 징병·징용에 의해 강제적으로 동원되면서 일본으로 건너가게 됐다.

그 당시(1939∼1945년) 조선을 오고간 정기 여객선은 제주-오사카의 기미가요마루(君が代丸)와 부산-시모노세키(下関)의 관부(関釜)연락선 등 두개 경로(항로) 유형이 있었다.

제주도에서 출발해 오사카에 도착하는 기미가요마루로 이 배는 1923년부터 1945년 초까지 제주도와 오사카 항로를 운항했다.

매달 3차례 제주의 각 기항지를 한 바퀴 돌고 일본으로 향해 제주도 출신자들이 이주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됐다. 제주도에서 이주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주에서 기미가요마루를 이용하여 오사카에 도착한 후 규슈, 주부, 간토, 도호쿠, 홋카이도 지방 등지로 이동해 징병.징용.노동,거주 등을 했다.

또한 제주도에서 출발해서 부산을 경유해 시모노세키에 도착하는 관부연락선이다. 이 배는 1905년 운항을 시작으로 부산과 시모노세키를 잇는 항로에 취항했다.

이 경우는 부산에서 관부연락선을 이용해 시모노세키에 도착한 후 규슈, 히로시마, 오사카, 간토 등지로 이동해 징병.징용.노동,거주 등을 했다.

현지조사에서 확인된 17개 지역을 중심으로 제주에서 출발해 일본에 도착한 후 오사카, 도쿄, 후쿠오카, 나가사키, 홋카이도 등 일본 각 지역으로 이주해 삶(징병.징용.노동,거주 등)을 살았다.

이동 경로별로는 간토(関東)지역 비율이 11개(38.1%)로 가장 높았으며, 홋카이도(北海道)가 5개(17.2%), 규슈(九州)와 도호쿠(東北)가 각각 4개(13.7%), 주고쿠(中国)와 주부(中部)가 각각 2개(6.9%), 긴키(近畿)가 1개(3.5%)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부분의 강제 연행된 사람들은 기미가요마루(君が代丸)와 관부(関釜)연락선을 이용해 오사카와 시모노세키(下関)를 경유한 후 규슈, 간토, 주부, 도호쿠, 홋카이도 등 탄광과 군수공장, 그리고 필리핀, 괌, 남양군도 등 군인·군속으로 강제 연행됐다.
 
결국 제주도 출신들은 제주와 부산을 통해 오사카와 시모노세키를 거쳐 일본 전국으로 강제노역에 동원된 일부 경로로 밝혀졌다. 이와 함께 일본에 먼저 건너간 제주도 출신들의 경우는 일본 현지에서 군인·군속, 탄광, 군수공장 등에 동원된 경로도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근무지별로는 탄광(광산) 비율이 12개(41.4%)로 가장 높았으며, 군수공장과 군부대가 각각 5개(17.2%), 건설공사가 4개(13.8%), 군사시설이 2개(6.9%)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일본으로 끌려간 징용자들의 경우는 대부분 탄광(광산)이나 철도, 댐 공사 등에서 강제노역으로 동원됐으며, 군속으로 차출된 경우는 군수공장이나 군사기지 건설에 동원됐다.

일본 나가사끼 군함도에서 사망한 제주인에대한 화장관련 서류. 이 자료는 민간인에 의해 서류가 보관됐도 일본 재야 역사학자에 의해 관리되고 있다.

결국 이들 대부분은 일본에 강제적으로 끌려가서 가혹한 노동조건에서 목숨을 잃거나 억울하게 죽음을 당해 원통한 삶을 살았다고 볼 수 있다.

사망 원인별로 가혹한 노동 비율이 11개(38.1%)로 가장 높았으며, 갱내 사고가 6개(20.7%), 공습·폭격이 5개(17.2%), 원폭이 3개(10.3%)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예를 들면, 1943년 5월 1일 나가사키(長崎)현 미츠비시(三菱) 다카시마(高島)탄광 하시마(端島)갱구에서 제주도 출신이 1943년 5월 매몰 질식사로 사망(高山文澤, 제주시 영평동)한 사실을 확인했다.

그리고 나가노(長野)현 마츠시로(松代) 대본영(大本営) 죠잔(象山) 지하호에서 반장으로 근무했던 제주도 출신 박문경(朴文璟, 당시 43세)의 경우는 1945년 2월 갱내 사고로 사망했고 그 해 3월 가족들은 도쿄로 피신했다가 공습으로 집이 전부 타버려서 아이치(愛知)현으로 이사해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일부 지역에서 추모비 1기와 제주도 출신 사망자 명단, 그리고 국내 무연고 합동 묘역에 제주도 출신이 있음을 확인했으며, 패전 후 일본에게 불리한 재일조선인 명단을 불태웠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연구자를 통해 확인했다.
  
고광명 박사는 “본 조사에서는 일본 정부의 자료 공개를 위해 한국 정부와 전국의 지방자치단체, 일본 시민단체, 한·일 양국의 연구자들과 함께 인적 네트워크를 구성해야 할 필요성을 인식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됐다”고 밝혔다.

고 박사는 “특히 일본 일부 지역의 일본인 향토연구자는 강제연행 자료(명부)를 보여주어 제주도 출신(11명 추정)의 명단도 일부 확인했으나 연구자가 개인정보 보호라는 명분으로 공개를 꺼려 제주도 출신에 대한 사망자 명단을 확보하는 데 아쉽게도 실패했다”며 “제주출신이 강제연행돼 억울한 삶을 산 흔적은 일본 전역 및 필리핀, 괌, 남양군도 심지어 하와이 포로수용소, 군함 등에서 발견했다”고 덧붙였다.

한편 이번 조사를 통해 근현대사이지만 4.3에 가려 역사 속으로 사라져가는 일제강점기 아픈 역사를 현지조사와 고증을 통해 실체를 밝혀내 이와 같은 역사의 전철을 밟지 않도록 하는데 기여할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

또한 이역만리에서 죽음을 맞은 제주인들 중 단 한명이라도 이름 등을 추가로 발굴해 억울한 삶을 보낸 이들의 실질적인 명예회복과 함께 원혼을 달래주는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역사적 사명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타가와시 석탄.역사박물관 주변에 있는 멀리 탄광이 보이는 탄광순직자 위령비 모습.

 

저작권자 © 제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