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4.3 70주년을 기념해 '제주4.3사건'이란 제목으로 5회 연재한다. 이 글을 쓴 고영철 님은 함덕초등학교 교장으로 정년을 맞은 제주의 역사를 연구하고 탐구하는 향토사학자이다. 현재 흥사단 부이사장을 맞는 등 시민운동에도 앞장서고 있다. 고영철 선생은 “수정할 때가 여러군데 있다”고 말했으나 국제뉴스제주본부와 제주뉴스는 4.3 70주년을 맞아 4.3의 지역화와 내면화를 확산하기 위해 5회 연재한다.

해안마을에 주로 쌓았던 마을방어성(1949년 1월)

특집 5회 최종편

(4) 기억해야 할 인물(義人)
 

박경훈 도지사.

① 박경훈(3․1사건 당시 제주도지사)
제주도 초대 도지사인 박경훈은 1909년 10월 20일 제주도 최고 거부(巨富)인 박종실의 4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경성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그는 해방 직전에 전남의 호남은행 행원이었다. 해방 다음 해인 1946년 2월 제주도사(島司)로 부임한 그는 같은 해 8월 제주도(濟州島)가 전라남도와 분리되어 도제(道制)가 실시되면서 초대 도지사를 맡게 됐다.

그의 도지사 재임 기간 중인 1947년 3월 1일에 소위 3․1절 발포사건이 발생해 무고한 도민 6명이 사망하고, 8명이 부상을 입게 되었다. 이에 민주주의민족전선에서는 즉각 발포 명령 경찰관의 처단과 사과, 피살자에 대한 보상, 투옥된 민주인사 석방 등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미군정은 이를 묵살하고 오히려 응원경찰의 수를 증가하고 주동자들에 대한 총검거에 나서는 등 강경 대응으로 일관하였다. 이와 같은 강경 대응에 도민들은 크게 반발하며 대부분의 관공서가 가담한 민․관 총파업을 단행했다.
 
도지사 박경훈은 파업에 따른 책임을 지겠다는 뜻과 경찰 당국의 강경 진압에 항의하는 의사 표시로 4월 7일 사표를 제출하였다. 퇴임 후 그 해 7월에는 민주주의민족전선 공동의장에 추대되기도 하였으며 이 바람에 좌익분자로 몰려 큰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다. 같은 해 제주신보 사장에 취임했으나, 편집국장 김호진이 무장대 삐라를 인쇄하는 바람에 같이 구속되기도 했다. 박경훈은 무죄로 석방됐다.

8월 14일에는 경찰이 제주민전 의장 박경훈을 비롯 도청 간부․사회인사 등 30여명을 '8․15폭동음모'와 관련해 체포했다. 박 의장은 3일 만에 석방됐다.(《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 홈페이지) 이와 같이 송요찬은 계속적으로 그를 살해하려고 시도했다. 그런 상황을 간파한 그의 아버지가 캔 사금을 미군에게 줘 미군 전용기로 1949년 서울로 가서 생활하다사건 한국전쟁으로 인해 부산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 후 서울과 제주를 오가며 사업을 하던 그는 1973년 심장마비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김익렬 중장.

② 김익렬(4․3 당시 국방경비대 제9연대장)
김익렬은 4․3 당시 제주도에 주둔해 있던 9연대 연대장으로서, 4․3을 조기에 평화적으로 수습하려고 노력했던 4․28회담의 주역이었다. 그는 경남 하동 출신으로서 1946년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해 소위로 임관하고 다음해 9월 제 9연대 부연대장으로 제주에 와 그 해 12월 연대장(중령)으로 승진됐다.

"나는 제주도 4․3사건을 미군정의 감독부족과 실정으로 인해 도민과 경찰이 충돌한 사건이며 관의 극도의 압정에 견디다 못한 민이 최후에 들고일어난 민중폭동이라고 본다"
"설사 공산주의자가 선동해 폭동을 일으켰다고 치자. 그러나 제주도민 30만 전부가 공산주의자일 수는 없다. 그럼에도 폭동진압 책임자들은 동족인 제주도민을 이민족이나 식민지 국민에게도 감히 할 수 없는 토벌살상에만 주력을 한 것이다."

김익렬은 그의 유고에서 위와 같이 밝히고 엄청난 희생자를 내게된 토벌대의 무차별 학살을 비판했다. 그는 무장대와의 4․28평화회담을 성사시켜 그 동안 긴장상태에 있던 제주도에 평화의 바람을 불게 하였다 그러나 회담의 합의는 5월 1일 오라리 조작사건에 의해 단 3일만에 파기되었고, 5월 6일 그는 미군정에 의해 9연대장 자리에서 물러나게 됐다.

그 후 제 14연대 연대장으로 발령 받았으며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공을 세우기도 했다. 1967년에 국방대학원 원장을 역임했으며 1988년 타계하여 국립묘지에 묻혔다.
그는 젊은 시절 9연대 책임자로서 4․28평화회담을 성사시켰고, 4․3 당시 토벌에 나섰던 미군정, 경찰, 경비대 쪽의 책임자 가운데 비교적 냉철하게 이 사건을 평가하고 희생을 줄이기 위해 노력했던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③ 현경호(제주중학교장)
미군정기 제주중학교 초대 교장. 초명은 현인종(玄仁宗). 호는 우계(又溪). 본관은 연주이며 제주시 노형동 월랑 마을에서 제주향교 직원이던 현승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현경호는 1919년 제주농업학교에 입학하여 1학년을 수료했고, 1924년 2월 노형동에 의성학숙을 개설하여 육영사업에 힘을 썼다. 또 그는 제주향교의 간부직에 있으면서 제주 유림의 중요한 기둥이 되었다. 해방 후 제주향교재단에서 제주중학교를 설립하자 그는 1945년 12월에 초대 교장으로 취임해 약 1년 간 재임했다.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제주 사회의 원로(元老) 역할을 온몸으로 실천했다. 단순히 교육 활동에만 머무르지 않고 나라의 장래가 어두워지는 것을 보면서 원로답게 사회활동의 전면에 나섰던 것이다. 1947년 2월 17일에는 미군정이 집요하게 방해하는 〈3․1절 기념투쟁제주도위원회〉의 부위원장을 맡았으며, 이어서 2월 23일 제주에서 민주주의민족전선이 결성되자 의장단에 추대되었다. 당시 의장단에는 그와 함께 안세훈(평생을 항일독립운동에 바친 항일투사이자 한학자, 당시 남로당 제주도당 위원장)과 이일선(관음사 주지)이 있었다. 이들 세 사람은 해방 직후부터 건준(建準)과 여운형의 노선을 지지하는 중도좌파적 경향 이러한 경향은 여운형의 최고비서인 고경흠(高景欽)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고경흠은 제주 출신으로서 당시 《독립신보》발간인이며 논설위원으로 제주 지역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상태였다.(열린제주시정소식 2002년 10월 1일 김찬흡의 ‘제주선인열전’)

3․1절 시위사건으로 한 때 구속되기도 했으며 1947년 9월 8일에는 우익의 소행으로 보이는 테러를 당하기도 했다.

1947년 9월 10일자 제주신보 기사 ; (9월) 8일 밤에는 도 민전 간부 현경호 댁(현씨 부재중)에 약 8시 반 경 전화로 자기는 감찰청 직원이라고 하며 현씨가 있고 없는 것을 확인한 후, 10분 후쯤 청년이 들어와 집에 있는 현씨 부인 안내로 온 방을 수색하였는데, 안내를 마쳐 현씨 부인이 방으로 들어가려 할 때 돌연 나타난 다른 괴한이 곤봉으로 동 부인의 머리를 강타하여 인사불성의 부상을 입혔고, 각 방안에 있는 가구 창문 등을 닥치는 대로 파괴하여 놓고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동 부인의 진술에 의하면 먼저 청년을 안내하여 탁주공장(현경호 소유)에 이르렀을 때, 공장 부근에 괴한 3명이 서 있었다 하며 경찰 당국에서는 범인 수사에 노력중이라 한다.(열린제주시정소식 2002년 10월 1일《김찬흡의 제주선인열전》에서 재인용)


험악했던 그 시절 이처럼 양심적이고 정의의 편에 섰던 그에게 돌아온 것은 학살이었다. 4․3발발 후 10월말부터 시작된 제주읍내 유지학살 사건 과정에서 박성내(현 제주여고 입구) 말 방앗간 부근에서 아들과 함께 희생되었다.
1969년 제주중학교 운동장 북서쪽 구석에 전(前)교장 강석범이 그를 기리는 비석을 세웠다. 비석에는 〈1948년 12월 23일 애석하게도 작고〉했다고만 쓰고 누구에 의해서, 왜, 어떻게 학살당했는지는 쓰지 않았다. 아니, 쓰지 못하였을 것이다. 당시만 해도 토벌대에게 죽은 사람은 모두 빨갱이 취급을 받던 때인데 빨갱이를 위하여 비석을 세운 것만도 보통 용기로는 못할 일이었으니까.

문형순 서장.

④문형순(모슬포․성산포경찰서장)
집 식구 중에 산에 올라간 사람, 산사람에게 식량이나 옷을 갖다 준 사람들은 자수하라고 했을 때 군과 경찰은 '명단'이 있다며 주민들을 협박했다.

자수할 수도,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서 죽음만을 기다릴 수도 없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이 때 바로 조남수 목사와 김남원 민보단장(리장)이 나섰다. 당시 모슬포 경찰서장이 문형순이었는데 두 분이 문 서장을 만났다. "주민들은 아무 잘못도 없다. 이들은 빨갱이가 아니다. 자수시킬 테니 살려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문 서장은 두 분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조 목사는 문 단장과 함께 마을 주민들을 공회당에 모이게 한 후 "마을 사람들이 다 죽게 됐다. 자수해야 산다. 이제 내 말을 안 들으면 하늘이 진동하고 땅이 요동을 치며 핏물이 흐르게 됐다. 명단이 (경찰에) 다 들어갔다"며 주민들을 설득했다.

결국 100여명의 주민이 조 목사와 민보단장의 말을 믿고 경찰서로 줄을 지어 자수하러 갔다. 그러나 그들 스스로가 살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죽을 걸로 알고 경찰서로 갔었다. 100여명이 경찰서로 가자 그들을 맞이한 사람은 바로 서청대원들이었다. 총과 죽창으로 마구잡이로 주민들을 죽였던 서청의 극악무도한 행동을 잘 알고 있던 마을 사람들은 공포에 휩싸였다.

사찰주임이 우리를 보자마자 "전부다 빨갱이들이다. 다 쏴 죽여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서청이 우리들의 조서를 꾸미기 시작했다. 영락없이 죽게 되는구나 생각했죠. 그 때 문 서장이 나타나 서청들에게 호통 쳤습니다.

"너희들 지금 뭐하는 거냐. 다 나가라. 자수하러 온 사람들이다. 전부 나가라"며 그들을 내쫓았습니다. 그리고는 조 목사와 문 단장에게 "이들을 민보단으로 데리고 가서 자수서를 써 오도록 해 달라"고 말했다"(고춘언씨 증언)

문 서장은 조 목사와 문 단장에게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마을주민들의 조서를 마을서기에게 쓰도록 했다. 경찰이나 서청대원이 조서를 받는다면 영락없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뻔히 알고 있던 그는 재치를 발휘해 마을서기가 자수서를 받도록 한 것이다. 주민들끼리 말을 맞추고 의논해서 아무런 탈이 없도록 쓰도록 한 것이다.

"마을 주민들끼리 공회당에서 모여 의논했습니다. 무엇 무엇은 쓰고 또 무엇 무엇은 쓰지 말자고 했죠. 또 입도 맞췄습니다. 조금이라도 흠이 될 만한 내용들은 전부다 뺐죠. 그렇지 않고는 전부 다 죽게 됐기 때문에 쉽게 입을 맞출 수 있었습니다."(고춘언씨 증언)

다음은 당시 산사람들의 위협 때문에 모슬포경찰서로 피신해 경찰과 함께 생활했던 마을 주민 이병연씨(89․대정읍 하모리)의 이야기다. 
"마을주민들이 자수서를 들고 경찰서에 찾아오자 서청단원들이 다시 조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문 서장이 다시 말했죠. "자수한 주민들이다. 강요하지 말라. 때리지도 말라"고 엄명을 내렸습니다. 그 때문에 아무 탈 없이 주민들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며칠 후 주민들은 다시 계엄사령부로 불려갔으나 민보단 자수서와 경찰의 조서를 본 군인들은 "시시하다. 아무런 내용도 없다"며 전부 주민들을 돌려보냈고, 100여명의 주민들은 무사히 귀가할 수 있었던 게 소위 '자수사건'이었다. 문 서장은 또 이 당시 경찰이나 서청단원들이 마을주민들을 함부로 잡아들이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경찰이 '누구누구는 산사람과 내통했다. 또 누구네 자식은 산으로 올라갔다'고 이야기 하면 문 서장은 "왜 말을 함부로 하느냐. 그 말에 대해 책임질 수 있느냐. 조사해서 사실이 아니면 너를 처벌하겠다"며 오히려 경찰에게 호통을 쳤습니다. 그 때문에 모슬포 주민들은 밀고에 의해 죽은 사람들이 거의 없었습니다"(이병언씨 증언)

선량한 마을 주민들의 생명을 살려내기 위한 문 서장의 행동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문 서장은 모슬포에서 성산포 경찰서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적에게 동조할 가능성이 있는자"를 검거할 것을 지시했고, 예비검속에 붙잡힌 사람들은 대부분 집단 총살을 당했다. 예비검속으로 마을마다 수백명씩  전도적으로 수천명이 다시 희생됐다. 모슬포 '백조일손' 사건은 대표적인 예비검속 집단 학살사건이었다.

1950년 8월 30일 제주주둔 해병대 정보참모 해군중령 김두찬은 성산포경찰서장에게 "예비검속자 총살집행 의뢰의 건"공문을 보냈다. 김두찬은 이 문서에서 "귀서에 예비구속 중인 D급 및 C급에서 총살 미집행자에 대해서는 귀서에서 총살집행 후 그 결과를 9월 6일까지 육군본부 정보국 제주지구CIC 대장에게 보고하도록 이에 의뢰함"이라며 총살집행을 명령했다. 그러나 문형순 성산포경찰서장은 전쟁상황에서 계엄사령부의 총살명령을 단호히 거부했다. 이 문서에는 "부당(不當)함으로 불이행(不履行)"이라는 문 서장의 서명이 들어있어 군의 총살명령을 문 서장이 거부했음을 보여줬다.

1950년 8~9월 경 제주도 전역에서 수천명이 죽어간 예비검속에서 성산면 지역의 예비검속자들만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부당한 명령을 거부할 수 있었던 문 서장의 용기 때문이었다. 이 당시 성산포경찰서 관할지역에서 예비검속으로 희생당한 사람은 모두 6명이었다. 그러나 이는 문 서장이 불가피하게 내 놓을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이었으며, 읍․면별로 수백명씩 죽음을 당했던 다른 지역의 상황과 비교해 볼 때 성산면 지역은 거의 온전할 수 있었다.

<제민일보>(1999년 1월 20일자)는 그가 모슬포경찰서장을 맡았을 당시 서귀포경찰서장이었던 김호겸(90․서울시 은평구)씨의 이야기를 빌어 이렇게 전하고 있다.
"문형순은 배운 게 없어 경찰 법규조차 몰랐다. 그 때 그의 별명이 '문 도깨비'였다. 그 까닭은 그가 초등학교도 나오지 않은 일자무식 때문이라기보다는 당시 경찰 중에서는 군대에 맞설 수 있는 드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문형순씨는 나보다 20살은 위로 당시 이미 50대의 중년이었다. 그는 기운이 장사였고 배짱 있고 남자다운 멋진 사람이었다."
김씨는 또 "박정희 전 대통령은 물론 제주지구 토벌대사령관이던 송요찬․함병선 연대장 그리고 나 역시 일제 때 모두 일본군이나 그 앞잡이인 만주군에 있었지만 그 때 문형순씨는 만주에서 활동하던 독립군이었다. 그런 경력 때문에 군대에서도 문 서장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문 서장이 제주도민들을 억울한 죽음에서 살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독립군의 정신이 깃들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4.3사건 발발 직후부터 종료직전까지 제주에 상주하면서 4.3사건 진압의 책임을 맡았던 지휘관 중 김익렬 9연대장을 제외하고는 최경록 11연대장, 송요찬 11연대장, 함병선 2연대장 모두 독립군을 탄압했던 일본군 지원병 출신이었다. 일본군 출신인 이들이 제주에서 선량한 양민들을 상대로 '초토화 작전'을 펼치며 수많은 양민을 학살할 당시 독립군 출신인 문형순 서장은 제주도민들의 억울한 희생을 조금이라고 막기 위해 모슬포 주민들을 보호했고, 성산포경찰서장 당시에는 계엄사령부의 예비검속자 총살명령까지 거부한 것이다.

모슬포 주민들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는 성산포경찰서장을 끝으로 경찰을 퇴임하면서 경제적으로 매우 힘들게 살아왔다고 전해진다. 퇴직 후 제주시에서 자그마한 가게를 운영하던 그는 장사가 안 돼 가게를 넘기고 제주의 첫 영화극장이었던 대한극장(현대극장의 전신)에서 매표원으로 일하다가 누구의 보살핌도 없는 상태에서 쓸쓸히 삶을 마감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제민일보 2005년 3월 30일) 제주지방경찰청 역시 1948년도 당시 경찰이 체계를 갖추지 못했던 탓에 문 서장에 대한 이후 자료를 찾을 수 없다고 밝히고 있다.(오마이뉴스)
 그밖에도 '몰라'로 일관한 남원읍 신흥리 김성홍 구장과 무차별 학살을 막은 남원지서 장성순 경사. 가시리에 파견되었던 강계봉 순경, 모슬포의 조남수 목사, 김남원 민보단장 등은 직접 사람을 살리는 데 한 몫을 한 분들이다.

⑤송정봉 여인, 몰라구장, 강계봉 순경
산으로, 동굴로 피신한 사람들에게 하루하루는 잠시 후를 기약할 수 없는 처절한 순간이었어요. 토벌대는 주민들이 숨어있는 굴을 찾느라 혈안이 되었지요. 양도봉씨는 이날 다른 사람들을 살리고자 비밀을 지켰던 한 여인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고 해요.
〈내가 숨었던 굴에는 나 외에도 송정봉씨와 그분의 시아버지, 네 살난 아들 등 5명이 함께 있었지요. 그날은 대대적으로 토벌을 왔고 송씨는 굴 속에 있다 아들과 함께 군인들에게 잡혔습니다. 
“굴 안에 다른 사람이 더 있느냐?”
군인들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송씨는 굴 속에는 자기뿐이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있는 다른 굴은 어디냐?”
그분은 용감하고 당찼습니다. ‘죽어도 혼자 죽겠다’며 버티더군요. 그분이 위협에 못 이겨 밝혔다면 난 죽었을 겁니다. 그리고 우리 굴 인근의 많은 다른 굴에 있던 여러 사람들 모두 희생되었을지도 모릅니다.〉(송정봉 여인 사례 = 김경훈, 제주 4․3의 이해Ⅰ(강의 원고), 2016.)

(5) 잃어버린 마을
1954년 9월 한라산 금족령이 해제된 후 중산간 마을 사람들 상당수는 원주지를 찾아 귀향했다. 그러나 농토를 개간하고 집을 새로 지어 살아야 했고, 아직 〈공비출몰지역〉이라 하여 자주 소개(疏開) 대상이 되었고, 이미 사망한 사람도 많았으며, 해안지대에서 정착한 사람들은 각지에 분산되어 있었고, 주민들이 집단적으로 희생된 흔적이 있어서 복귀를 원하지 않는 주민들도 있었다. 1962년까지 원주지로 복귀하지 않은 이재민은 7704세대 4만 419명이었다. 결국 4․3사건 이후 오랜 기간에 걸친 난민정착복구사업에도 불구하고 원주민들이 복귀하지 않아 단순경작지로 바뀌어 버렸거나 그대로 방치된 마을이 많이 생겨났다. 현재까지 조사된 잃어 버린 마을은 모두 84(87)개로 이름은 다음과 같다.(진상보사보고서 517~520쪽)

제주시 도남동의 못동네, 섯동네, 알동네, 웃동네, 화북동의 곤흘동, 큰태왓, 오등동의 죽성마을, 민밭마을, 큰가름, 아라1동의 웃인다라, 오라동의 어우눌, 고지레, 선달뱅디마을, 해산마을, 연미마을섯동네, 연동의 주수동, 삼동동, 해안동의 리생이, 해안동 동동네, 노형동의 드르구릉, 함박이굴, 방일리, 캐진이, 괭이술, 물욱이, 벳밭, 숙이못, 섯가름, 도평동 와평마을, 이호2동의 호병밭, 멧밭, 회천동의 드르생이

서귀포시 대천동의 영남마을, 중문동의 사단마을, 상예동의 어음케, 색달동의 천서동

북제주군 한림읍 상대리의 고한이, 한산이왓, 금악리의 일동이못, 웃동네, 볏진밭, 명월리의 빌레못, 동명리의 케왓, 애월읍 봉성리의 자리왓, 말밭, 상수를, 열류왓, 고도리왓, 지름기, 어음1리의 고지우녕, 유수암리의 범미왓, 소길리의 원동마을, 광령1리의 덴남밭, 상귀리의 부처물, 하귀1리의 광동, 고성1리의 웃가름, 한경면 저지리의 하늬골, 산양리의 다리왓골, 구좌읍 세화리의 랑쉬, 덕천리의 화전동, 대림동, 평대리의 탈전동, 송당리의 장기동, 알송당, 광전동, 가시남동, 조천읍 선흘1리의 물터진굴, 새동네, 큰굴왓, 선흘2리의 백화동, 와산리의 웃동네, 종남밭, 제비보리

남제주군 남원읍 신흥리의 신돌선밭, 의귀리의 웃물통, 한남리의 빌레가름, 남원2리의 반월동, 고냉이논밭, 대정읍 신도3리의 새나못곳, 안덕면 동광리의 무등이왓, 삼밭구석, 조수궤, 서광리의 관전밭, 진전밭, 상천리의 오리돈물, 광평리의 조가동, 표선면 가시리의 새가름 등이다.

5. 살아 남은 사람들
4․3으로 더 많은 고통을 당한 사람은 오히려 살아 남은 사람들이었다. 소개와 대량학살 이후, 산악과 중산간지대에서 활동하고 있는 게릴라를 마을과 격리시키기 위해 축성공사(築城工事)가 시작되었다.

이 城은 돌로 마을을 빙 둘러가며 쌓는 것이었는데, 살아 남은 모든 사람들이 동원되었다. 살아 남은 사람들의 고생은 축성(築城) 후에도 끝나지 않았다. 그들은 민보단에 가입하여 보초를 서야 했는데, 남자가 절대 부족한 상황이라 여자들은 물론 어린애와 노인까지 동원되었다.(濟州4․3硏究所 주최 제주 4․3 第50周年 記念 《第2回 東ASIA 平和와 人權 國際學術大會》〈濟州道와 4․3〉) 조천읍 선흘리 낙선동의 예를 들면 사삼사건 때 일시 폐촌되었던 선흘리가 1949년 초부터 복구되면서 조천면민이 동원되어 인민유격대의 공격을 방어할 목적으로 알선흘(낙선동)에 쌓은 성으로 지금도 거의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다.

살아 남은 사람들은 하루하루를 생명의 위협 속에 살아야 했다. 가족 중에, 특히 젊은 남자가 집안에 없는 경우는 무조건 폭도 가족이라고 괴롭힘을 당하고, 심지어는 목숨을 잃기까지 했다. 살아 남기 위해 서로를 밀고하는 일도 흔히 행해졌고, 토벌대의 '길라잡이(知路人)'가 되어 산악지대를 헤메며 게릴라는 물론 숨어 있던 마을 사람들을 찾아내는 일을 해야 했다.

4․3의 상흔은 물질적 기반의 상실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집요하게 달라붙는 과거에 대한 어두운 기억이 정신질환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애월읍 원동 출신으로 당시 13살에 학살 현장에서 살아 남았던 양창석(梁昌錫)은, 술 한 잔 마시고 어두운 곳을 지날 때면 “군인덜이 왐저! 날 죽이레 왐저!" 하며 앞에 보이는 전신주고, 나무고, 아내고 가리지 않고 돌팔매질하고 주먹질을 해댔다. ‘살아남은 사람들이 더 고생했주' 하는 말이 실감나는 대목이다.

일본에는 제주인이 많이 살고 있다. 그들이 처음 도일한 시기는 일본이 한국을 강점했던 192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1948년에 4․3이 일어나면서 다시 건너간 사람들도 많다. 그들은 해방 후 벅찬 가슴을 안고 귀국했었다.

이 시기 일본에서 귀향한 제주인은 6만 명이 넘었다. 인구가 28만 명에 불과했던 제주도는 이 많은 귀환자들을 맞을 준비가 채 되어 있지 않았다. 혼란스럽기만 했던 조국의 현실은 그들이 자유롭게 경제활동을 하고, 정치활동을 하도록 할 기반도 여유도 없었던 것이다. 1948년 4․3이 일어나면서 귀환자 다수가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직간접으로 4․3에 관련되어서 건너간 사람도 있었지만, 토벌대의 무차별 학살을 피해 간 경우도 많았다. 지금 在日濟州人 중에는 4․3으로 가족이며 친인척이 학살된 사람들이 많다.(濟州 4․3 硏究所 주최 제주 4․3 第50周年 記念 《第2回 東ASIA 平和와 人權 國際學術大會》〈濟州道와 4․3〉)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를 엿볼 수 있는 자료로서 효돈초등학교 단기 4281년도 학사보고 내용 중 학교 행사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10월 15일 鄕土實情觀察(面內各里一巡視), 03월 11일 警官民保團慰安藝能會, 03월 18일 南元面罹災民慰安會, 05월 08일 消風兼第二中隊慰問藝能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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