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많은 제주여성 1975년에 日정부서 사망증명 받아 ...강제징병.징용 2만여명 유족 동의없이 야스쿠니신사에 합사

일본 후생성에서 발행한 사망증명서..

고태수 박사(일본 삼존사 주지 법명 고진황)에 따르면 1939년 군 징용은 일본거주 조선인 결혼 안한 미혼 남자가 대상이 됐다고 밝혔다.

고 박사는 “징용을 면하기 위해 재일거주 제주도민들은 제주도로 건너가 제주도 여성과 결혼했다. 이어 징병과 징용 2차대상은 한국에 결혼 안한 미혼남을 대상으로 징용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890년 1월생인 제주시 조천읍 신촌리에서 출생한 강제징병자 김모씨는 딸이 있음에도 해군군속으로 1943년 11월19일 남태평양제도 남양군도 도서 근해서 전사했다는 일본 후생성 원호국장의 명의로 사망증명서를 1975년 4월12일 ‘원발제18호의 14’로 딸인 김씨(에이코)에게 전달됐다.

강제징병자 김씨는 38세에 부인을 잃고 딸 하나가 있는 가운데 태평양전쟁 중 남태평양 제도에서 숨졌다.

딸인 김씨는 일찍이 어머니를 잃고 할머니가 키웠고 김씨의 전사통보는 제주도 제주시 조천읍 동생에게 전달된 것으로 알려졌다.

딸 김씨는 목포로 유학할 정도로 수재로 당시 5년제 학교에 입학 졸업 후 어협(현재의 수협)에 다니다 아버지가 휴가를 받고 일본에 도착했다는 전갈에 기미가요마루 호(군대환, 제주에서 오사카를 왕래하던 선박)를 타고 일본행을 선택했다.

딸의 사망 前 전언에 따르면 아버지는 휴가시 딸에게 “마지막으로 한 번만 전쟁에 나가고 다음 돌아올 때는 전쟁에 더 이상 나가지 않아도 된다“며 ”가족과 같이 살겠다“고 약속했다는 것.

그러나 이 장면이 마지막으로 딸 김씨가 아버지를 보게 된 기구한 운명의 시작이란 사실이다.

이후 딸은 일본 오사카 제주인이 많이 사는 이쿠노구에 거주하며 결혼도 했으나 순탄치만은 않아 자식도 없었다.

그러던 중 1975년 아버지의 사망증명서가 딸에게 전달됐고 아버지 김씨가 동경 야스쿠니신사에 위패 모셔졌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이에 딸인 김씨는 고태수 박사(일본 오사카 삼존사 주지 법명 고진황)와 함께 동행해 위패가 모셔진 것을 확인했다.

일본정부에 위패 모셔졌는지 여부를 묻자 위패여부는 안 알려줬으나 명단을 찾고 봉납된 것도 확인했다는 것.

강제징병자 김씨는 사망증명서에는 해군군속으로 되어 있으나 야스쿠니신사에는 용병으로 등록된 것으로 확인했다. 이에 대해 고태수 박사는 “일본이 보상 등 여러 가지 이유 등으로 강제징병자가 아닌 일본을 위해 싸운 용병으로 등록하는 꼼수를 부렸다”고 비난했다.

딸 김씨는 일본에서 사망해 한 많은 세상과 이별했다.

일본취재에 증언하고 자료도 협조한 사진 좌측부터 고광명 박사, 고태수 박사 고병수기자.

한편 제주대학교 고광명박사의 자료에 따르면 2011년 12월31일 현재 일본에 강제징용, 징병을 신고한 피해신고접수는 22만6638건으로 제주인은 2890건을 접수했다.

2890건중 군인은 423건, 군무원은 527건, 노무자 1910건, 위안부 1건, 기타 24건, 미표시 5건 등이다.

정부가 피해신고 심의 결과 전국적으로 21만9489건이 인정됐고 제주인은 2852건이 인정됐다.

2852건 중 군인은 361건, 군무원 569건, 노무자 1847건, 각하.기각.판정불능은 75건인 것으로 나타났다.

고광명 박사는 피해신고자 명단과 관련해 “제주도청 또는 국가기록원에 명단이 있다”고 확신하며 “이제 제주도민 강제징용, 징병자에 대한 생사확인 등과 함께 이를 역사적으로 남기기 위한 작업이 필요하다.시간이 얼마없다”고 말하며 이에 대한 연구가 시급히 필요함을 내비쳤다.

고 박사는 "제주도차원의 정책과제와 함께 재일제주인 징용실태조사와 함께 현지조사를 통한 유골 수습과 재일제주인 징용관련 유적지 탐방프로그램으로 제주인의 정체성을 살리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일부 학자는 650만 명이 강제 징병 징용돼 조선 밖으로의 동원도 약 85 만 명보다 압도적이었다는 일본의 공식적인 통계자료이고 이후 진행된 각종 조사에 의해 조선 밖으로의 동원을 200만 명까지 추정하고 있다.

(사) 태평양전쟁 희생자유족회 연혁에 따르면 지난 2003년 4월29일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군인,군속,노무자 48만명에 대한 일제강제연행자명부를 공개했다.

세부적으로 조선인징용자에관한 명부6권 2만7949명, 조선인노동자에 관한 조사결과 15건 6만9766명, 일제하 피징용자명부 3권 1만4410명, 군인,군속 사망자명부 육해군 2만1692명, 자유한인보 1권 2623명, 선박군(오끼나와) 유수명부 1권, 희생자(군인,군속,노무자)전산색인목록 디스켓 48만693명 등이다.

그러나 지난 2006년 5월 1일 현재 1차 피해접수 20만9455명 2차 피해접수 5202명 등 총 21만4655명이 접수됐다.

또한 동아시아 역사재단 "야스쿠니에 묻는다" 연구자료에 따르면 한국인 약 2만여명이 유족의 동의없이 야스쿠니신사 무단 합사된 충격적인 사실도 드러났다.

일본정부는 한국인 군인군속 사상자 국적 바뀌었다는 이유로 보상대상에서 배제에도 불구하고 야스쿠니신사에 그들의 개인정보를 제공해 일본인으로서 합사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것.

일본정부에 따르면 후생성이 야스쿠니신사에 제공한 한국인 자료는 2만727명분이다. 야스쿠니신사에 따르면 합사는 2만1181명 합사됐다.

이는 전후 한국인 합사가 후생성의 자료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고 후생성이 한국인의 야스쿠니신사합사에 조직적으로 관여했다고 동아시아 역사재단은 연구자료에서 주장했다.

일본정부가 한국인 합사를 야스쿠니신사와 공동으로 모의하고 정부차원서 자료를 제공한 결과 한국인이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됐다는 것은 명백한 역사적 사실이라고 재차 주장했다.

유족이며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소속인 이희자씨는 일본 토쿄고등법원 항소심 최후진술에서 야스쿠니신사에 있는 "내 아버지의 이름을 빼라"고 했다.

그녀는 “야스쿠니신사는 희생자와 그 가족을 대하는 기본적인 예의도 자격도 없는 곳”이라고 항변해 일본정부에 대한 유족들의 마음을 대변했다.

일본 오사카 성내에 있는 신사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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